클린 설라 캠페인) 우리, 사람다운 대화를 해봅시다
(맨 아래 한 줄 요약 있음)
해당 글은 서울 팬 커뮤니티인 FC서울라이트가 활성화되고, 나아가 전례 없는, 하이텔 시대를 넘어선 커뮤니티 사이트 활성화 시대에 도달한 그대, 나,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작성된 글입니다.
자, 어디부터 이야기해야할까.
먼저 예전에 내가 책을 하나 추천한 적이 있다.
일본의 문화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이 그것이다.
해당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붙인 적이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무지는 죄가 아니어도 무사유는 죄니까."
지식, 즉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단순한 지식의 양은 더 이상 지혜를 대변하지 않는다.
한때 연어와 같이 귀했다 한들 정보화 시대 이후 감자처럼 굴러다니게 된 게 정보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무사유적으로 내뱉는 사실은, 부분적 사실만 가져오면서 자신을 수호하고, 타자를 말살하는 행위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전과 다르게 단순 경험론적인, 노인의 시체적인 경험만으로 점철된 의견 같은 사실만을 내뱉는 행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이 호의적이지 않은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거부하는 행위인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러한 거부행위는 지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무사유의, 즉 지혜롭지 않은, 타자를 말살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화행위에서 지혜롭고, 사유가 깊은 행위란 바운더리가 참 넓고 깊다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야 우리는 대화를 할 때, 단순히 발화 텍스트만을 보는 게 아니라 텍스트 외부 상황, 컨텍스트나 발화자의 어투 등도 감각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걸 감각한다는 걸 의식하는, 다감적 행위에는 다정함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정하다는 건, 멍청한 게 아니라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를 의식한 채 사유를 한다는 것이다.
말을 이쁘게 하는, 즉 다정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끌리는 이유는, 그 사람의 지혜에 끌리는 것이다.
다시 한나 아렌트의 말로 돌아가보자. 왜 무사유가 죄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타자를 매몰하고, 계층화 시켜, 모두가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공간을 부정하는 파시즘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근데,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니다보면 아직도 지식=지혜라고 생각하며 타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이들은, 마크 피셔가 말한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들이다. 일상이 매몰된 사람들.
그들은 자신만이 실존이며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믿고 말을 한다. 지식을 근간으로, 상대를 매몰시키기 위해 대화를 한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다른 이들을 밥으로 여기는 뱀파이어지.
자신의 태도가 꺾이면 인생을 부정당하는 양 입을 꾹 닫고 모르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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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줄 요약
제발 제발 제발, 우리 모두 다정하게 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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