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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그렇게 너한테 하고팠던 말을 적었지만 네가 이 사이트를 안 했으면 좋겠다. 본다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거든?

북붕_71888609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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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cseoulite.me/anonymous/16100399 복사

물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임영웅님과 영웅시대에 감탄했던 어제, 나는 참 신기한 일을 같이 겪었다.

이십대가 되고 중반까지 두어 번의 대단찮은 연애를 했지만 '대단찮은'의 말뜻답게 끝나고 보니 별 의미가 없었던 나다. 그렇다 보니 정작 좋아하는 마음이 컸던 건 교복을 입던 때의 짝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원한 적도 없는데 누가 좋아지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부드럽게 표현할 방법도 몰라 쳐다만 보다 끝나는데 '그 안에서' 온갖 깊은 마음의 파동은 다 겪어보는. 그래서 누굴 사귀는 것보다도 좋음이나 힘듦이나 고강도로 느껴지는.

중2 때의 내게 그런 산, 바다, 언덕을 선사해줬던 네가. 어제 상암에 있었다. 나는 모든 환호와 호의가 끝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다가, 정말 어쩌다가 이젠 기억나지도 않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덤덤하게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어졌구나 생각했던 너를 말도 안 되게 다시 보았다.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려다 무심코 한 번 더 돌아봤는데 무표정에서 웃음으로 넘어갈 때의 찰나가 너무 너였다. 눈매도 너였고 분위기도 너였지만, 표정이 바뀌는 순간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너였다. 일행이 있었는데도 같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해도 너였다.

너와 내가 학교를 나온 곳은 서울과 한참 먼 땅인데. 너는 군복무와 휴학으로 한참 늦어버린 나보다 훨씬 진작에 과로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일할지 모르는 직장인이 됐을 텐데. 그때의 네가 공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전혀 아니었는데. 경기장에서 잠깐 쳐다본(다행히 눈이 마주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이 도무지 너일 리가 없다는 조건은 너무도 많았는데, 내가 본 모습이 의문조차 갖기 힘들 만큼 너였다. 

지금이라고 뭐 그렇게 크게 바뀌었겠냐만 그때의 나는 너무 못난 채였다. 아무도 관심없겠지만 혹여 누군가 내 전기를 쓰겠답시고 취재한다면, 인생을 살면서 가장 뭘 몰랐고 가장 별로였던 때는 그때였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구레나룻을 주체할 수가 없는 더벅머리에 북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빼빼 말랐던 몸, 관리가 뭔지도 몰랐던 나머지 세수만 하고 학교로 향하던 아침.

하지만 가장 못난 건 누가 좋으면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고, 그런 상태로 너를 좋아한 나 자체였다. 지금은 안다. 그 나이엔 이성한테 관심을 받는단 이유만으로 놀림이나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좋아한다고 자연스럽게 말 한 마디 못 붙이는 주제에 따라다니면 엄청난 짐이 된다는 거. 지금도 떠오르면 때려죽이고만 싶은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네게 민폐가 됐다.

몰랐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고 공부한 뒤로 나는 항상 네가 떠올랐고 미안했다. 차라리 마음이 없는 척 할 걸. 내 주제에 너같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사람이랑 뭐라도 같이 할 수 없단 걸 잘 아는데도 왜 걸리적거렸을까 싶었다. 누구나 길을 걷다가도 흑역사가 떠오를 수 있고 나는 그 빈도가 잦은 사람이다. 떠오를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했는데 정작 부끄럽다 미안하다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한참 전에 사라져서 그렇다 해본 적은 없었다.

10년이 넘었다. 너를 처음 만난 것. 너는 내게 어떤 말도 어떤 접점도 건네본 적이 없는데 나 혼자 좋아했던 것 그게 네게 걸림돌이 됐던 것.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사라지고 풍화될 수 있는 시간을 지났더니 나는 너를 다시 보았다. 상상조차 못한 시간 공간 상황 공기 그런 것들로부터.

그래서 본 김에 이제 오래 끙끙거리기만 하던, 그러면서 자괴감만 키우던 말을 한 번 전해보려고 한다. 정말 미안하다고.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그런 기억은 남기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고. 삶에서 가장 부끄럽던 모습으로 가장 깊은 마음을 가져본 사람에게 다가가려 한 건 앞으로도 자꾸 떠올라 내 감정을 싹 태워버릴 것 같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었다고.

내가 정말 미안해. 전부 잊어줬음 하고 최소한 서울 축구 볼 때만큼은 어제처럼 항상 행복한 일이 가득하길 바라. 이젠 같은 구역에서 승리를 원하는 (비록 평생 그 사실을 네가 모르길 바라지만 아무튼) 동지니까.



+) 그렇게 네게 미안하다 했지만, 네가 제발 이 사이트를 안 했으면 그래서 이걸 못 봤으면 좋겠긴 해. 아직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거든. 근데 베테랑이 마킹된 올해 이전 유니폼을 들고 있던 걸 보면 이미 하드하게 축구를 봐서 여기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예상이 제발 틀리길.

++) 추신 쓰다 생각난 거 하나. 너는 이딴 걸 도대체 왜 보니...? 너 멀쩡한 사람이었잖아 공놀이 같은 것에 흥미 없던. 왜 이런 웬수같은 리그와 기복타다 DTD해버리는 팀에 빨려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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