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창단 40주년 북니폼 오픈런 후기.txt
평소에 나이키 운동화가 됐든, 디올이나 샤넬이 됐든, 아니면 하다못해 이름난 맛집이 됐든 뭔가를 구매하기 위해 오픈런을 뛰는 것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서울 유니폼도 평소엔 개막한 뒤에나 슬렁슬렁 정보를 뒤져서 샀지 판매 시작 요이 땅! 하자마자 사본 적이 없었고요.
그런 제가 뭐하다가 꼭두새벽 전철을 타고 집에서 2시간 거리의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오전 8시에 도착해서 오픈런을 뛰었느냐, 이 이야기를 하려면 구단의 유니폼 판매 공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이번만큼은 '오픈하자마자 질러서 완성된 유니폼을 개막전에 입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휴학과 노동으로 돈을 좀 벌었거든요. 대학 마지막 학년이니 다음부턴 당연히 더 궁핍해지고 더 시간이 없을 거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정말 공개와 함께 유니폼을 사고 마지막(?) 불꽃을 유감없이 태우고 싶었습니다.
물론 판매 일정 발표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구매로 사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다 떠나서 집이 경기장하고 너무 멀잖아요?
그런데...
아르바이트 도중 쉬는 시간에 판매 일정을 확인한 저는 충격과 공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온라인 판매일이 수강신청 날하고 시간까지 완벽하게 겹쳤거든요. "너 북니폼 한 벌 사느라 막학년 포기할래?" 하고 대학본부와 프런트가 손잡고 이른바 '칼협'을 시전하는 듯한 심정이었고, 결국 시즌 전에 유니폼을 완성시키고프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오픈런.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했던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죠. 온라인으론 판매 시작하는 날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구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는 이미 작년에 물량부족이 ○○○아디다스 스폰 구단보다 덜할 뿐, 언제든 생겨날 수는 있는 일이란 걸 배웠습니다. 만약 40주년 기념에 코로나 규제도 더 풀렸다고 지난해보다도 많은 수요가 몰린다면? 그래서 온라인마저 품절이 나고, 개막전 앞두고 후면 상단 스폰서 확정도 안 나서 이후의 공급 자체가 늦어진다면? 아니면 기껏 주문했는데 공지대로 주문량이 많아서 수령까지 시간이 10일 넘게 걸린다면? 저는 본격적인 취준 전 마지막 시즌 개막전을 지금은 김천 간 선수 마킹이 돼 있는 작년 유니폼을 입고 나가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했어요.
새벽 5시 40분에 나가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까지 도보 30분, 그곳에서 상암까지 약 2시간. 집에서 나갈 때만 해도 편의점조차 문을 열지 않아 내가 알던 곳보다 어두운 다른 세상에 왔나 싶었는데 아침햇살을 받는 저 에스컬레이터를 보니까 무슨 천국의 계단 같더라고요. (그때는 몰랐습니다. 정말 승천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열받는 일이 일어날 거라곤..)
아무튼 도착했습니다. 오전 8시였고 저는 생각보다 훨 좋은 순서에서 40주년 킷을 수령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일찍 나갔다곤 하지만 몇 년 전에도 이런 행사를 다녀왔는데,
그 때 워낙 사람이 넘쳐서 수십 분을 기다린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 정도는 제 앞에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다행히 제 광기가 서울 사는 특권층 북붕이들을 이겼습니다.
다 좋은데, 순서도 좋아서 참 잘 왔구나 싶었는데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추웠어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름 이를테면 빨간내복 같은 방한용품으로 감싼 다른 부분은 문제가 없었는데, 낡아빠져서 발등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신발 때문에 발이 참 추웠습니다. 9시 30분쯤 되니까 발가락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주말 아침잠과 신체(???)를 포기해가며 기다리는데, 판매 시작 30여분을 남기고 상상도 못했던 소식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이 공지를 보고 '번호 아래에 이름을 넣으면 위에 신한플레이가 들어오든 SOL이 들어오든 하다못해 우리카드 우리WON이 들어오든 상단스폰만 사다가 붙이면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리얼리티를 위해 선수명을 아래쪽에 붙이려고 했는데, "상단 스폰의 문구나 크기가 확정되지 않았으니 아래쪽에 붙이려면 오늘 붙이지 않는 쪽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겁니다.
이게 팬파크나 구단 프런트 쪽 잘못이 아닌 거 잘 압니다. 모기업 GS 계열 밖의 스폰패치니까 스폰 제공 측에서 제때 결정을 안 하면 우리 쪽에선 할 수 있는 게 없는 문제니까요. 그런데 공지로는 분명 하단에 붙이면 되겠구나 싶은 정보를 받았는데 구매까지 30분 남기고 고민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던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당일, 구매 직전 혹은 직후가 아니라 일정 공지 때 들었으면 저도 '그냥 화보촬영 때 이름이 상단이었으니 상단에 마킹하자', '마킹지 까짓거 개막전 날 붙이자' 같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결국 9시 반이 넘은 시점에서 마킹 선수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축구 좀 본다는 지인들을 주말 아침에 제 휴대전화 속으로 죄다 끌어모아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물론 상단에 이름을 넣으면 그만이고 훨씬 더 멋있지만, 저는 '기껏 10만원 넘게 주고 산 유니폼이 경기를 뛰는 선수와 다르다면 굳이 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요. 나름의 마음고생 끝에 결론을 냈습니다. 상단마킹을 붙일 공간이 안 나온다면 그냥 빼고 말지 하는 심정으로 이름을 하단에 넣기로 했습니다. 마킹지를 갖고 가자니 집에서 안 잃어버리고, 안 구겨진 채로 놔두고 있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기껏 새벽부터 나와서 달구지 같은 전철 타고 2시간 버텼는데(무슨 노선인진 굳이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노마킹 유니폼 들고 빠지기엔 좀 억울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 번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대기시간이 10분쯤? 10분보다 적게? 남았을 때 두 번째 고비가 찾아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뭐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특정될 수 있는 누군가를 저격하는 일은 제가 무슨 피해를 입었든 있어선 안 될 일이니까요. 그냥 '그 일' 이 일어남으로 인해 지금 아무리 추워도 매장에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유니폼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10번대 대기자들은 들어가고도 10분 넘게 더 기다려야 했고, 이 추운 날 판매 시작 뒤에도 바깥에 있던 그 이후 대기자들은 '저기선 유니폼을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어오나...' 싶은 마음으로 영문도 모르고 필요 이상의 시간을 밖에 더 있어야 했으며, 직원분들은 판매 시작 종이 치자마자 생각할 수 없었거나 했어도 신속하게 처리하긴 힘든 문제에 당황한 채 예상보다 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는 점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정도면 다 표현했다고 믿습니다. 예.
그런 일들을 겪고 좋은 점이 아예 없던 건 아닙니다. 아직 마킹 못 한 주장과 역시 유니폼이 없는 레전드 사이에서 며칠을 갈팡질팡했던 제 마음이 상상도 못한 일들을 겪고 직원분 앞에 서니 허무할 정도로 빨리 정해졌거든요. (나상호는 어웨이로 꼭...) 입문하고 한 벌도 없었던 유일한 레전드를 옷장에 들일 수 있게 됐다. 그게 오늘의 크나큰 수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2010-20년대 서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오스마르-고요한-박주영-기성용-고광민(마킹한 순서대로)을 전부 손에 넣은 성공한 팬이 됐습니다.
하지만 수확은 수확이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를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 평소엔 고려도 안 하는 정도의 고생을 해서 도착하고 기다렸는데,
2. 갑자기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져서
3. 같은 팀 팬을 대상으로 화가 나는 추한 제 마음을 경험했고
4. 선수용과 똑같이 만들지 못할 수도 있는 유니폼이 수중에 들어왔으며
5. 그 결과로 몸과 마음이 전부 지쳤다
뭐 이 정도 같습니다. 구단이나 판매 측에서 잘못한 게 없음에도, 늦게 가서 순서가 뒤로 밀린 게 아님에도, 오후 약속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좋으려고 한 일에서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시즌 들어가면 이런 찝찝함이나 화보다는 환호와 보람이 홈구장에 훨씬 더 많이 녹아있길, 그래서 모든 서울팬들이 승리하고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는 행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글은 여기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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