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R : 사람 마음 참 간사하고, 나는 그게 감사하고

 * 서울과 큰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얘기가 다수 포함된 글입니다. 이에 대해 알길 원치 않으시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뭔지 대충 알 것 같은 이별을 했습니다.”

 -인스타툰 ‘달디단 일상’(당시 규찌툰) 중에서

 마음이 뜬 걸 진작 알았던 사람과 헤어졌고, 어제는 그때로부터 2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는데도 대책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걷다가 울고, 아르바이트 하다가 울고, 마스크가 있어서 사장님한테 들키진 않겠구나 싶다가 그런 생각이나 하는 게 싫어서 울고, 전철 타고 다니다 울고 하는 날들만 계속됐다. 울음이 가신다 해서 잔잔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울지 않으면 그 울음은 흉곽 속에 들어차서는 자책으로 변질해 내면을 어지럽히고 괴롭혔다. 울 수도 없고 울지 않을 수도 없는 하루가 과도하게 많아지니 두려워지기도 했다.

 나 자체가 음울한 사람으로 굳어지면 어떡하지 싶은, 설마 싶다가도 딱히 그렇게 되지 않는단 보장도 없는 두려움이었다.

 어제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하고 2주쯤이 된 날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내 코가 석 자를 넘어 잘려버린 상태다 보니 개막전을 굳이 가야 하나 싶은 마음도 계속 스스로를 드나들었다. 즐기지 못할 거면 올라간 티켓값을 줘가며 갈 이유가 없었고, 괜히 팀에 나쁜 기운을 주는 게 아닌가 싶은 과대망상증도 마음이 별로여서인지 수시로 발병했다. 가서도 이렇게 울기나 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원정석 예매자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에 일단 예매는 해뒀지만 매일 고민했다. 이런 상태에서 경기를 보러 가는 게 맞는 걸까. 다녀온다고 뭐가 바뀌긴 할까. 경기가 끝나고 지친 채로 전철에 몸을 싣는 순간 지금의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그럼 뭐 하러 갈까.

 뭐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 봤지만, 과거의 나는 내게 서울 축구를 선사한 지인과 이미 약속을 잡은 상태였고 안 갈 수는 없었다. 못 간다고 핑계댈까봐 이렇게 강제를 하다니.

 “Adversity does teach who your real friends are.”

 -Lois McMaster Bujold

 박진섭 감독 시절의 광주전 이후 두 해 만에 만난 친구는 꽤 많은 면에서 그대로였다. 프로스펙스를 욕하면서도 그들이 만든 트레이닝복을 이미 몇 개씩 갖고 있을 정도로 구단 굿즈를 많이 산다거나, 경기장 밖에서도 상대 구단을 시원하게 욕한다거나, 키 크고 잘생겼다거나, 환승하느라 수십 분을 길바닥에 버리는 내 시간도 아무 불평 없이 기다려준다거나 하는 거의 모든 면이 전과 비슷했다. 가장 비슷했던 점은 내 마음이 저 바닥에 처박혀있던 반으로 찢어져있던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경기장에 오기로 결정한 게 잘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행히 피치에 들어서기 전부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메마른 밤의 끝에서 조금은 힘들겠지만, 똑같은 어젠 오지 않을 거라고"

 -우리의 서울_나상현씨밴드

 똑같은 어제가 반복됐다. 똑같이 울었고 자책했고 우울해했고 이제는 돌아가지도 못할 것들을 떠올렸다. 그게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게이트를 들어서 피치 앞에 도착했고, 그때부터는 모든 게 똑같을 새가 없었다. 돌아가지 못할 시절들을 전부 거슬러 아예 코로나 전으로 기어이 돌아가버린 듯한 인파가 개막을 반겼다. 몇만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것을 바라고 말한다는 것, 너무 오랜만에 겪는 웃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시간을 보냈든, 여기서는 소리를 지르고 서로 어깨를 걸며 그 시간들을 되찾지 못할 곳까지 멀리 날려버리면 그만이었다. 

"두근댑니다, 뜨겁습니다!"

-김명정 SPOTV 캐스터, 2019년 6월 16일 슈퍼매치 오프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억할 필요 없는 것들을 드디어 기억하지 않으며 소리를 지르던 사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임상협의 슛이 휘어져들어갔다. 머리에서 뭔가가 제어할 수 없이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장면을 보고 나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있어도 마음이 나아진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워낙 세게 맞아서 잠시 까먹은 척했던 것뿐. 골이 터지고 경기장의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인지 머릿속도 시원해졌다. 전처럼 울어서 차가워지는 게 아니었다. 텅 비어, 쓸모없는 것 하나 없이 끝내 텅 비어 시원해질 따름이었다. 우리 팀은 어제 딱 내 머리속의 시원함만큼 잘했다. 이길 만한 경기를 해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지 신기할 정도야."

 -어제 친구한테 보낸 카카오톡.

 

 그렇다. 어제 경기가 끝나고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함께한 친구에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경기 전만 해도 어떻게 이렇게 숨막히고 괴로운지 신기할 정도였던 사람의 90분은 정말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직전까지 죽을상을 했던 내가 왜 이렇게 많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괜찮은 대상을 찾아서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하루 참 오랜만에 울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간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하루였다. 그 간사해지는 마음이 고마울 수 있다는 것도.

+)

"잘 지냈어요?"

"... 잘 지내려고 했어요."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마지막회 중에서

잘 지내려고 할게.

당신은 굳이 잘 지내려 하지 않아도 잘 지내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