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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후기

23 6R : 누군가를 무언가를, 가슴 뛰도록 좋아한다는 것. (초장문주의)

심서연 title: 뗑컨심서연 8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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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cseoulite.me/free/16139705 복사

 지금같은 분위기에 해선 안 될 말이지만, 나는 미스터트롯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편이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최고 최고~ 내 마음 속에 최고~"

 방의 위치 때문에 집에 있는 TV를 얇은 벽 하나 두고 마주한 채 잠을 자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소리가 잘 시간마다 들리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잠을 못 자는 건 큰 고통이 맞으니까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했다. 엄마는 잔인하게도 그 가수 자체를 싫어할 만한 틈은 주지도 않으셨다. 논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멀쑥한 성인 남자도 아닌, 나보다도 한참 어린 미소년 가수를 보고 잠 못 자서 시끄럽다고 싫어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도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엄마니까 "시끄러우니 보지 말라"는 망언을 지껄이진 않았다. "엄마, 제가 잠을 정말 못 자서 그런데 본방송만 보실 수 없을까요?" 같은 애원을 주로 했고, 며칠 참아주시다가 다음 주가 되면 다시 재방은 물론 유튜브를 TV에 연결하시고… 여기까지 하겠다.

 수면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삶의 질까지 서울의 최근 몇 년간 순위만큼 떨구던 미스터트롯을 이른바 '재평가'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엄마가 그 가수가 광고하는 대체유 제품을 사서 내게 주셨던 날이었다. 평소에 두유를 가끔 사시긴 했지만 아몬드밀크 쪽엔 아예 관심이 없으셨던 분이라 '갑자기 왜 사셨지?' 싶었는데, 엄마는 물어보기도 전에 뭔가가 붙어 있는 TV 옆 서랍장을 가리키셨다. 아몬드밀크 회사에서 제품을 구입하면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던 거였다.

 "우리 동원이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물론 잘생겼다. 그 가수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키와 앳된 목소리로 처음 미스터트롯에 등장했던 순간부터 정말 잘생겼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었던 순간 내 눈에 들어왔던 얼굴은 그가 아니라 엄마의 얼굴이었다.

 엄마의 표정이 텍스트 따위엔 다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환했다. 모자란 아들 건사하시고 (너무도 좋은 분이지만) 무뚝뚝하신 아빠 투정 받아주시느라, 회사에선 하루 종일 서서 일하시느라 웃음을 갖기 힘든 분이셨다. 과거형이다. 어떤 가수를 만나고 좋아한 뒤로 엄마의 인생은 달라졌다. 나는 그날 이후로 빈말로라도 절대 트롯 씬을 힐난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가슴 뛰게 좋아한다는 건, 그런 일이다. 필름을 손수 돌려야 나오는 치지직대는 흑백 영화 같던 한 사람의 삶이 픽사의 역작 <UP!>을 용산 아이맥스에서 보는 듯한 컬러풀함으로 바뀌어버리는 일이다. 비처럼 오는 일상의 피로에 젖어들었던 사람을 훨훨 날아다니게, 언제나 활짝 웃게 하는 마법 같은 일이다.*

(* 엄마가 좋아하시는 가수 정동원의 노래 <나는 피터팬>의 가사를 변형한 문장이다.)

 엄마를 통해 온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좋아하는 일'의 마법을, 지난 주말 뜻밖에도 내 본진(?)에서 목도했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케일과 함께.

 

A매치보다 '더했던' 서울월드컵경기장

 이 소제목이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싶을 사람도 있긴 있을 것이다. 국가대표팀 경기는 6만 6천여 석의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꽉 채우기도 하는데, 기록상으로 5만 명도 오지 않은 그 날 경기가 어떻게 A매치를 넘을 수 있냐고.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한 열기는 분명 A매치 이상이었다. A매치는 보통 평일에 개최된다. 그렇다 보니 경기 3시간 전에는 직장인들이 경기장까지 오기 쉽지 않고, 따라서 그 시간대에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공강을 이용해 코로나 이전 A매치에 이른 시간부터 가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대구전 당일 내가 경기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19분이었다. 4시 30분에 킥오프한 경기였기 때문에 3시간 하고도 11분이 더 남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는

 다음과 같았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사진은 '경기 3시간 전'의 모습이다. A매치에 가도 이 시간대에 이 정도의 인파가 몰리지는 않는다. 국가대표 경기의 입장 줄은 끝도 없이 길어 북측광장까지 늘어지지만, 에스컬레이터 줄이 길어 도착하고도 바로 탈 수 없는 현상을 겪어본 적은 없다. 감탄했다. 불편해서 싫다는 감정 같은 건 없었다. 내 몸이 불편한 건 물론 사실이겠지만, 팀의 암흑기나 코로나19 같은 경기장이 휑해지는 상황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많은 인파 덕에 줄을 서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건 불편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2018년, 고래등같이 큰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단 4천 명이 들어와 경기를 지켜보던 삭막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팬 한 명 받을 수가 없어 프런트와 선수단 그리고 미디어만으로 경기가 진행되던 펜데믹 에라 또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모든 시간을 견뎌낸 보상을 상상조차 한 적 없는 방식과 크기로 받는 기분을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티켓 발권과 입장 줄 역시 예상보다 더 길었다. 게이트 오픈 시간에 맞춰 무인발권기에 가면 원하는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계산하고 팬카페에서 출발했는데, 웬걸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발권기 앞에 있는 것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아직 오픈되지 않은 경기 입장 줄이 눈에 보였다. 역시 북측계단의 시작점까지 이어져 있었다. 2019년 콜롬비아와의 A매치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립다 못해 사실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을까 싶어질 정도로 무디어지던 순간을 국가대표보다 더 사랑하는 팀의 경기를 통해 다시 만났다. 지인과 함께 "사람이 뭐 이리 많냐"며 푸념했지만 사실 지인도 나도 서로의 눈빛에 에너지가 가득한 채로 하는 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화룡점정은 입장 이후였다. 기나긴 발권 줄을 뚫고 나니 다행히 입장 줄은 빠진 뒤였다. 입장게이트에선 티켓 바코드를 한 번 찍으면 절차가 끝나지만 발권기는 생년월일과 전화번호를 예매자가 직접 입력해야 해서 과정이 더 길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고팠던 시간보단 좀 지각했지만, 경기장에 입장하는 순간엔 언제나 큰 설렘이 있다. 포토카드를 하나 뽑고 들어갔더니 그 설렘이 예상과 상상 이상으로 커져버렸다. 

 잔디밭보다 관중석이 먼저 보였다. 축구를 오래 본 입장에서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좋아하는 선수들이 뛰어다니고 경기가 펼쳐지는 잔디를 미뤄두고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관중석을 볼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날은 많이 달랐다. 이렇게 꽉꽉 채워진 구장을 K리그 경기에서 볼 수 있다고? 그런 날을 항상 꿈꾸기야 하지만 이렇게 빨리 눈앞에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상현씨밴드가 각자의 밤을 보내야 할 때 봐야 할 풍경으로 회색빛 도시를 좋아하지 않듯, 나나 대다수의 서울 팬들도 상암 특유의 회색빛 관중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삭막한 빛이 사라지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뭉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경이로웠다. 경기를 보기도 시축을 보기도 공연을 보기도 한참 전이었는데도 경이로웠다. 동쪽을 쳐다본 순간 벌어진 입을 한참 동안 다물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내 삶을 바꾸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니 과분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영웅시대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로 그들과 무관할 수도 있던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까지 바꿔버렸다. 조건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는 말이 가족 간에만 유효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모두에게 은은하게 내려앉아 그 모두를 웃음짓게 만들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날 경기장의 통신 상태만큼은 진짜로 A매치보다 더했다. 한참 전에 가신 줄 알았던 '3G'가 다시 우리 앞에 불쑥 고개를 내민 것으로 모자라 비행모드를 켠 적이 없는데도 전파 자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뜻의 기호가 핸드폰 상단 바에 자리잡았다. 국가대표 경기는 통신사 중계차를 배치하기에 이렇게까지 전화가 안 터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날의 서울에도 수가 A매치보다야 적었겠지만 중계차는 왔다. 그럼에도 전파 자체가 막혔다는 건 영웅시대의, 수호신의, 우리 모두의 마음이 그만큼 뜨거웠다는 말일 거라고 의미를 만들어 본다.  


함께 뛰자 서울, 함께 가자 영웅

 사람이 꽉 들어찬 경기장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다. 일 년의 절반을 경기장에서 사는 우리도 정신이 없는데 처음 축구장 나들이에 오신 분들은 더했을 것이다. N석 3층에 잠시 올라가 지인과 사진을 찍던 도중 영웅시대 회원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두 분께서 우리에게 좌석 구역을 여쭤 보셨다. 

 나름대로 찾아도 보시고 직원들께 물어도 보셨을 것이다. 하지만 6만 석이 넘는 경기장에서 단 두 자리를 찾는 건 어떤 초심자에게나 힘든 일이다. 직원 분들**은 다른 관중도 있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에 직접 안내 드리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래 가셔야 할 곳이 E석 A구역(1층이고 S석 바로 옆이다)이었음에도 N석 2층에 있던 우리에게까지 떠밀려오셨을 것이다. 직원 분들이 상황 때문에 하실 수 없는 일을 대신 해보기로 했다. N석 2층에서 E석 A구역을 가기 위해선 계단을 내려가 동쪽으로 걸어 N석을 벗어난 뒤 E석 전체를 가로질러 S석 바로 옆 귀퉁이까지 가야 한다. 계단 한 층과 엔드라인의 절반을 먼저 걸어간 후 사이드라인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을 보고 설명해도 초행길을 직접 가시긴 어려운 거리라고 판단했다. 

(** 소리를 지르고 불친절하게 응대한 직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웅시대 회원 분이 직접 서울 팬페이지 중 한 곳에 인스타그램 DM을 보내주셨고 현장에 서울 팬 목격자도 있었다는 걸 보아 사실일 것이다. 서비스업을 하면서 그 서비스를 팽개친다는 것도, 구단의 이미지에 손해를 끼쳐 놓고 구단으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것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좋은 날 좋은 일에 대해 글을 쓰면서 악담으로 마무리하긴 싫으니 더 심한 말은 하지 않겠지만, 구단에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저랑 같이 가실까요? 나 갔다 올 테니까 이따 우리 자리에서 만나."

 영웅시대 회원 두 분과 내 지인 모두에게 급하게 이야기한 후 길을 나섰다. 

 "이렇게 봄나들이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저희가 원래 이만한 관중 여러분을 자주 모실 수 있는 팀이었는데, 팀도 힘들었고 코로나도 있고 해서… 다시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경기장의 절반을 걷는 5분여 동안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대갈등이 문제라고 한다. 정치성향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중심이 많기에 모든 잡음과 분쟁 또한 가장 많이 일어날 서울에서 만난 청년과 장년에게 그런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했고 서로가 좋아하는 뭔가를 격려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삶이 바뀌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이 바뀌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울의 응원 구호 중에 "함께 뛰자 서울!" 이 있다. 선수단이 스크럼을 짜고 가열차게 지르는 콜 또한 "함께! 뛰자!' 다. 우리 안의 결속을 다지는 이 문장이 '영웅'이라는 안온한 바깥으로 스며 녹아든 날이었다.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있던 우리가 경기 전부터 함께였다. 

 

영웅과 함께, 신과 함께. 함께 뛰어 만든 승리

 끝없는 인파, 끝없는 호의, 끝없는 따스함.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서로가 기대하던 순간을 만들었다. 

https://youtu.be/Z9F5rRhSJFY

 진군가가 K리그 앤섬을 덮었다. 구름같은 관중만큼이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수호신이 기대했던 순간이 진군가를 선수 입장 때 틀지 못하게 되고 두 달만에 이뤄졌다. 40주년 앤섬이고 곡이 바뀜으로써 우리가 틀지 않을 이유 또한 없어졌기에 진군가 대신 앤섬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우리들의 목소리로' 덮어보자 했던 시즌 초의 결의가 말도 안 되게 빠른 시간에 이뤄졌다. 이제 E석과 W석을 가득 메운 영웅시대의 시간이었다.

 북쪽의 염원이 이뤄지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동쪽과 서쪽의 바람도 이뤄졌다. 경기장을 둘러싼 전부에게 꿈 같은 그날을 만들어준 장본인, 임영웅이 서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발을 딛었다. 시축은 서포터들의 입까지 떡 벌어질 정도로 멀리 나갔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K리그 타 구단의 트랙탑을 입고 찍으신 사진도 있고, 가수 본인도 팬들도 'FC서울' 대신 'K리그'를 강조하는 분위기였기에 시축 자체로 감사하는 마음이었지만 정작 임영웅도 영웅시대도 서울에 진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시축 때의 "FC서울 화이팅!" 이야 장내 아나운서님이 요청하시기도 했고 시축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후 영상을 돌려보니 임영웅은 골이 터질 때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났고 찬스 때마다 서울 팬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였다. 수많은 영웅시대 회원들도 서울이 득점할 때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아예 갖가지 응원을 함께하기도 했다. 줌인서울로 확인한 영웅시대의 어깨동무와 '랄랄라 응원'에 경악했다. 프런트와 서포터가 10년을 노력해도 안 되던 전 관중의 서포터화를 단 하루만에 이루다니. 반올림하면 5만 명, 어지간한 군(기초자치단체)의 인구만큼 많은 사람들이 전부 하나가 되었다. 서울 경기를 직접 가서 본 그 어느 날보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사실 시축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걱정이 컸다. 최근의 서울은 밥상을 차려주면 엎는 팀으로 유명하니까. 2018년 단 1골만 더 넣으면 승강전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기어이 최종전 영패로 승강전이라는 지옥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이 팀은 계속 판을 뒤집어왔다. 2019년엔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는 팀을 여름 이적시장 때 방치함으로써 시즌 마지막까지 ACL에 가네 못 가네를 무기력하게 다퉈야 했다. 2020년엔 수 년을 염원했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감독 없이 치르며 승패가 중요하지 않을 지경의 모습을 보였고, 졸전 끝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21년엔 유능하다 평가받던 감독을 데려와 놓고 9월까지 12위를 기록했고 작년엔 그 최하위를 탈출시켜준 감독과 함께 했음에도 홈 최종전에서 잔류를 확정지을 기회를 날려먹어 38라운드 원정 경기까지 잔류를 확정하지 못했다. 최근에 겪어본 적이 없는 사실상의 만원관중과 지금의 서울을 구성하는 선수들에겐 낯설 열기. 어쩌면 이건 어버버하다가 잘 짜여진 무대를 날려먹을 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서울은 한참 달랐다. 황의조의 K리그 복귀골이자 서울 데뷔골은 서막에 불과했다. 세트피스를 지지리도 못했던 팀은 코너킥으로 골대를 때리는 날카로운 헤더와 직후의 득점을 만들 수 있는 팀으로 변모했다. 권완규와 나상호가 환호했고 경기장은 터져버렸다. 팔로세비치는 프리킥을 참과 함께 '재앙'이란 키워드에 엮인 자신의 별명도 전부 걷어차버렸다. 전반전 3대 0. 끝이 없이 늘어서 엮인 '함께'가 서울의 위닝 멘탈리티를 '뛰도록' 만들었다. 좋은 마음으로 뭉친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더 바랄 게 없는 경기를 보고 맞은 하프타임에서 우리는 그 좋은 전반 때보다도 큰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pgUI_IbYETw

 시축만으로 모든 관중을 날아갈 것 같이 만들었던 임영웅이 재킷과 가죽바지를 입고 다시 그라운드에 입장했다. 잔디에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한 축구화도 함께였다. 축구공이 축구장에 없었는데도 있을 때보다 더 큰 함성이 상암벌을 덮었다.

 가요계의 신을 넘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분의 공연에 감히 코멘트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자세한 이야기는 접어둔다. 대신 임영웅의 자세에 감탄한 일화를 소개한다.

 경기 다음 날, 이 글의 초입에 등장하셨던 엄마가 "임영웅 잘 보고 왔냐?"는 연락을 주셨다. 그리고는 미스터트롯 전 회차 본방 애청자의 관록에서 나오는 평가를 내려주셨다. 

 "나는 유튜브(그게 FC서울 유튜브였길 바란다) 로 봤는데 춤이 늚."

 그렇다. 토요일 서울월드컵경기장 그라운드에서 베일 것 같이 완벽한 각을 만들어냈던 임영웅은 원래부터 춤을 잘 추는 아티스트는 아니었다고 한다. 일부 영웅시대 회원들조차 '평소에 각목인데 놀랐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가수에게나 자신이 잘 하는 노래로 환호받고 싶은 욕심이 있다. 4만 5천 명 앞에서라면 더욱더 그런 마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예술가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임영웅은 그 보편적인 예술인의 목표를 놓아줬다. 대신 평소에 잘 하는 분야가 아닌 춤으로 경기장을 달구는 선택을 했다. 심지어 아예 자신의 노래가 아닌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선곡하기까지 했다. 물론 콘서트와 방송 그리고 유명세가 있으니 춤을 추는 무대 또한 늘었을 것이고, 이미 사람들을 환호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데엔 무리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잘하는 일로 환호를 받는 모든 아티스트의 꿈 대신 가장 잘하는 건 아닌 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축구장의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드는 쪽을 선택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임영웅 같은 수퍼스타라면 더더욱. 


 차원이 다른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일단 임영웅은 확고히 그렇다.

  

 후반전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큰 일을 겪지 않았다. '강력 본드***' 백종범의 선방이 이어졌고 서울 공격진은 전반에 워낙 좋은 장면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인지 지친 기색이었다. 더 이상의 득점은 없었지만 실점도 없었다. 반박의 여지 없이 이번 시즌 중 가장 좋은 경기였다. 모든 게 완벽했다. 리그 3위나 FA컵 결승 같은 타이틀이 아니라 경기 자체로, 경기장에 찾아가는 경험 자체로 이렇게까지 큰 행복감을 느낀 적이 전에 있기는 했나 싶은 정도였다. 

(*** '강력 본드'는 한 영웅시대 회원 분께서 FC서울 유튜브 댓글을 통해 직접 지어주신 백종범의 별명이다. 다음 홈 경기 장내 아나운서의 콜에 이게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슴 뛰도록****

 잔치는 끝났다. 잔치가 끝나고 고난이 시작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다음 날 나는 근육통을 앓으며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들어했고 그건 총 6시간의 강의를 마친 오늘,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의 아픔에서 오는 스트레스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행복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잔치는 끝났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걸 토요일로 알았으니까.

(**** 연두색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정동원 팬클럽의 상징색, 검빨은 우리 구단의 상징색, 하늘색은 임영웅과 영웅시대의 상징색. 비록 서로 다른 것이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좋아하며 나의 경험과 타인과의 만남을 각자의 색채로 물들여간다. 모두가 '건행' 해서 계속 그리할 수 있길.)


 엄마는 한때 내가 축구장에 자주 가는 걸 싫어하셨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이 상암과 멀고 고작 축구 때문에 하루를 통으로 쓴다는 걸 그때의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엄마의 경험이 나를 이해할 정도로 넓지 않았으니까. 비록 학교 때문에 잠시 떨어져 살지만, 지금은 주말이 되면 가끔 "서울 갔냐?" 는 말씀을 건네신다. 내 학교는 서울에 없다. 서울에 갈 일이라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가야 할 일뿐이다. 내가 축구를 보는 걸 싫어하시던 때는 언제고 이젠 당연하게 여기신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신 엄마는 FC서울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하실 수 있는 경험과 마음으로 발을 넓히셨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덜 웃고 조금은 덜 울게***** 되었다. 감정이 무디어진다는 건 그만큼 가슴 뛰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 일상이 흑백에 가까워진다는 것. 감정과 경험의 처음을 떠나보내고 설렘이란 무지개를 잃어버린 우리는 이제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색을 골라 삶 위에 칠하고 있다. 그게 연두색일 수도, 검붉은 색일 수도, 청명한 하늘색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빛깔을 좋아하는 마음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그 마음이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한때 서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본 적도 있는 엄마와 나는 좋아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감대가 생겼다.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분야에 있던 수호신과 영웅시대는 좋아하는 마음 하나를 매개로 손을 잡아 K리그 역사에 남을 90분을 연출했다. 우리가 가진 색은 다르지만, 어떤 색깔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무늬를 만들어갈 수 있어 즐겁다. 

(***** 임영웅 이전에 우리 FC서울에겐 '원조' 보이스가 있었고, 지금도 하프타임마다 있다. 그분들이 슈퍼매치가 되었든 향후 다른 경기가 되었든 올해에도 꼭 기타와 베이스를 둘러매고 드럼을 세팅한 채 방문해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마지막 인용문은 나상현씨밴드의 신곡 <찬란>의 가사다.)


 단색보다 스트라이프가 좋다. 이건 서울 팬들의 진리다. 토요일에 겪어봤는데 두 가지 색보다 셋이 아름답더라. 삼색을 둘러입고 집으로 돌아가니 엄마 손에 네 번째 색이 들려있어 다채로웠다. 그렇게 누군가와 무언가를 가슴 뛰도록 좋아하다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을 나눈다면 한참 전에 산개된 우리 인생의 무지개를 다시 찾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토요일, 누군가에겐 팬미팅이고 누군가에겐 축구 한 경기였다. 나는 거기서 앞으로만 가는 시간이 진작에 데려가서는 과거로 유폐시킨 것 같았던 알록달록한 희망을 되찾아 유니폼 안에 품고 왔다.


 추신) 엄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정동원 노래 들으라고 이야기한 시간이 거의 3년 같은데 아무래도 영웅시대에 가입해야 할 것 같아. 

 그래도 언젠가 우리가 같이 노래방에 갈 때까지 정동원 노래를 연습해 볼게! 아무래도 '나는 피터팬'이 신나는 곡이니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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