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스를 찾아서 : 일본 축구 여행 2편
1편 : https://fcseoulite.me/best/17856735
:: 응원가, 그리고 조공
이미 극한의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집단에 새로운
이방인이 들어와 환영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수반된다.
모두가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요도코 벚꽃 스타디움에
홀로 FC서울의 노란색 골키퍼 유니폼을 입은 이방인이
양한빈 한명만을 응원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관종"이 아닌
양한빈은 물론, 세레소 오사카를 지지하는 "서포터"로써
환영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레소 오사카의 응원석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같은 서포터즈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교류하기 위해서,
나아가 "세레소오사카의 양한빈"이 세레소의 서포터즈에게
더욱 환영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 궁리를 해본다.
사실 이 고민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상암 N석을 처음 찾은 "뉴비"가 어떻게 하면 "고인물"들의
이쁨을 가득 받을 수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니깐 말이다.
선수들의 힘을 북돋아줄 수 있는 응원가를 외워
90분 내내 목청껏 부른다면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든
(상대팀의 유니폼은 안된다. 왜 안되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말고
믹스백 좌석이나 원정석으로 가자), 피부색이 어떻든,
만에하나 지구인이 아니더라도 환영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튜브에 들어가 "cerezo osaka chant"를 검색하니
가사 자막을 달아둔 응원가 영상 모음집이 등장한다.
(https://youtube.com/@ROU1994)
FC서울을 비롯한 한국 축구팀들의 응원가가
선수보다 팀 중심으로 재편되어있다면, 세레소 오사카의
응원가는 팀 응원가보다 선수 응원가 중심으로 이뤄져있었다.
90분 내내 계속해서 다른 팀 응원가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울 수 있는 한국의 여느 구단들과 달리, 세레소의 팀 응원가와
구호는 6~7개 정도로, 한 경기에 같은 응원가가 중복되어
리딩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총 응원가 개수는 세레소가 서울을 비롯한 K리그 구단을
압도할 정도로 많은데, 바로 신인부터 베태랑 선수에
이르기까지 선수명단 내 모든 선수에게 개인 응원가를
하나씩 제작해주기 때문이다.
팀의 상징 정도로 여겨질 수 있는 선수에 한해서만
개인 응원가를 만들어주는 한국과 달리, 모든 선수들에게
응원가를 제작해주는 J리그의 응원문화는
우리나라의 축구와 야구 응원문화를 섞은 듯 한 느낌이었다.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응원가 영상을 클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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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루오 신-지테~ 오레라와 사케-부~
사 이케 사쿠라노 센-시 호코리오 무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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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라 라 라라 라 다카하기 요지로~"
추억 속 멜로디가 깜빡이조차 켜지 않은 채 훅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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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 알레 알레오 오사카~ FC서울 알레알레~
알레알레알레 알레알레알레 FC서울 알레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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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은혜의 후렴구가 스승의 은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듯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오사카"를 "FC서울"로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바꿔 부를 수 있는 응원가도 보인다.
역시 축구 응원가의 멜로디는 팀과 국가를 불문하고
돌고 도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응원가 목록을 인기순 정렬에서 최신순 정렬로 다시 바꾸니,
가타카나로 쓰여진 "# 1 ヤンハンビン"이 보인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언제나 가장 먼저 부르던 응원가인
"골을 주지 않는 서울 양한빈" 응원가 대신
세레소의 서포터즈가 만들어준 양한빈의 응원가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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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마모리누케! 마모리누케!
오레라노 고-오루 마모레요
화이팅화이팅 양-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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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알법한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멜로디 위로
"지켜라 지켜라 우리의 골을 지켜라"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화이팅 화이팅 양-한빈 대신 무의식적으로 "오늘밤은 양-한빈"이
튀어나오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 덕에 처음 듣는 응원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몇번은 불러 본 응원가인 양 입에 잘 달라붙는다.
MBTI가 극도로 P에 치우친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자신이 즉석으로 떠올린 아이디어가 신박하다고 여겨지면,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있단 사실을 말이다.
출발 3일 전, 문득 "이왕 시간이랑 돈 들여 보러 가는 거,
양한빈에게 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조금 더 본격적인
무언가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의 금전적 소비를 감수하더라도 팬들에게는 환심을,
선수에게는 기운을 불어넣어주기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
양한빈이 담긴 "나눔용" 현수막과 엽서를 만들기로 한다.
곧장 포토샵을 켜고, 세레소의 유니폼을 입은 양한빈과 서울의
유니폼을 입은 양한빈을 함께 담은 그래픽이미지를 만든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일본어 구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서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선물용 엽서 50장을 인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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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 디자인으로 엽서도 조금 만들어서 응원석에 있는
서포터들에게 선물할까 생각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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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시안을 검사도 맡을 겸,
토니시상에게 한번 더 DM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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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멋진 디자인이네요!
만약 만나게 된다면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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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이다.
이제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2021년부터 찍은 양한빈의 사진을 전부 담은 USB와
현수막, 엽서를 주섬주섬 배낭에 챙겨둔다.
:: 여기가 양한빈의 도시입니까?
나고야에서 친구와 조우한 뒤, 버스를 타고 오사카로 향한다.
나고야에서 오사카까지는 버스로 세시간, 잠시 눈을 붙이니
버스는 금세 오사카 우메다 스카이빌딩에 도착한다.
경기까지는 아직 6시간이, 입장까지는 아직 4시간이 남은 탓에
숙소가 있는 신세카이에 먼저 들러 체크인을 해둔다.
입고있던 평상복을 양한빈의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허리춤에는 FC서울의 머플러를, 목에는 세레소의 머플러를
두르니 몸 안에 있는 서포터즈의 DNA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쟤네가 감바오사카 맞지?"
숙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횡단보도 건너 익숙한 유니폼이 보인다.
감바오사카의 파란색과 검정색의 세로 줄무늬 유니폼.
과거 이곳에서 뛰었던 황의조에게는 유감스러우나,
현재 내 신분은 양한빈, 그리고 세레소 오사카의 팬.
게다가 모 팀과 수상할정도로 비슷한 유니폼의 배색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있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황의조가 여기서 종신한다면 다시 고려해볼 의사는 충분하다.)
체크인 후 붕 뜬 시간을 활용해 신세카이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파검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우리 홈경기 맞지..?"
분명 오늘 경기는 감바가 아닌 세레소의 홈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분홍 유니폼은 보이지 않고 감바의 팬들만 잔뜩 눈에 띈다.
도시 중심부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오사카더비의 열기가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레소의 팬들에 혹여나 응원전에서 밀릴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경기장 주변에 가면 분홍색 유니폼이 보이겠지 싶은
희망사항을 가진 채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세레소오사카의 홈구장인 도요코 벚꽃 스타디움은
오사카 지하철 미도스지선의 나가이역에 위치해있다.
도톤보리가 있는 난바역에서 지하철로 6정거장,
신세카이와 텐노지가 있는 텐노지역에서는 지하철로 3정거장.
여러모로 여행을 목적으로 오사카에 온 사람들에게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있는 것 같다.
플랫폼으로 지하철이 들어오고, 지하철에 탑승하는 순간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불안감은 불식되기 시작한다.
좌석에 앉아있는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노부부 한쌍부터,
깃발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까지. 파검의 물결은 온데간데 없이
지하철을 가득 매운 벚꽃빛 물결이 걱정을 기우로 만들어준다.
좌석에 앉은 노부부와 눈이 마주치자, 목에 감긴 세레소의
머플러를 보셨는지 서로 환하게 목례를 주고받는다.
"이번 역은 나가이, 나가이"
출입문이 열리고, 분홍 물결이 출구로 쏟아져 나온다.
굳이 구글맵을 켤 필요도 없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인파는 마치 플레시몹을 보는 듯 그대로 경기장으로 이어진다.
히트택을 입은 채 방문했던 2월의 요도코 스타디움에
4달이 지나고 에어리즘을 입은 채 다시 돌아왔다.
4단 전과 다를게 없는 경기장 주변 풍경과 달리,
고요했던 경기장 광장은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1번의 주인공은 당반럼에서 양한빈으로 바뀌어있다.
아직 경기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열기는 경기가 시작하기 30분,
아니, 3분 전이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음화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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