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분들을 위해 쓰는 김남춘의 이야기.
# 일대기
대전시티즌으로 합류 할 뻔 했던
김남춘 선수는 한계를 느껴고
광운대학교 축구부로 입단을 하게 된다.
광운대 주장완정을 차고 경기를 뛴
김남춘 선수는 인정받고
자유 선발 선수로 FC서울에 입단 하게 된다.
2014년 8월 16일 ,
인천Utd 전에서 프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후 3백과 4백으로 바뀔 때 마다 자리가 불안해졌고
백업 요원으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아졌었다.
2016년 시즌이 끝나고 상주상무 군 입대를 한다.
전역 후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부상까지 당하는 악재가 겹치고
2020년도에도 1라운드 부터
부상으로 자리를 이탈했지만
김호영 체제에서는 부활한 모습을 보였었다.
누구보다 서울을 사랑했고,
서울에 애정을 주는 선수였었다.
부상때문에 아쉬웠고, 부진하는 모습에 아쉬웠지만
마지막 시즌 보여준 ‘ 춘디치 ‘ 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여담이지만, 작성자는 경기장에서 김남춘을 본 적 없다.
2018년 입문 후, 작고하신 날까지 갔던 직관 경기에서는
부상이였거나 명단제외로 뛰는 모습은 중계로만 봤다.
김남춘 선수의 장점
-활동량-
김남춘 선수의 활동량은 정말 좋았다.
황선홍 시절의 4백에서 오스마르-곽태휘 조합의 단점을
해결해준 선수가 김남춘 선수였다.
당시 오스마르 선수를 올려서 기용하고 김남춘 선수가
곽태휘 선수의 짝으로 낙점 받았었는데,
곽태휘 선수의 느린발과 압박 부족을 해결해준 선수였다.
부상이 빈번했지만, 활동량과 압박 부분에서는
꾸준히 좋았다.
-멀티포지션-
상주상무 시절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봤었다.
3백 시절에 유사 시 4백처럼 운영 될 때
김남춘 선수의 임무는
수비형 미드필더 처럼 올라가서 중원 압박이였다.
유사 시 공격 상황이 오면 라인을 올려서 경기를 할때
좀 더 적극적인 공격 루트를 시작하는데
도움을 준 플레이였다.
Q1. 김남춘은 서울에서 잘하던 선수였나요?
A.
애매했어요. 대신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는 맞습니다.
Q2. 왜 기일에 개천이 언급되는거에요?
A.
2020년10월31일, 작고하신 다음 날
시즌 마지막 경기가 홈에서 열리는 경인더비였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원정팬 출입은 금지였습니다.
우리는 잔류확정이였고, 개천은 경우의 수 였습니다.
우리는 정상컨디션과 멘탈로는 뛸 수 없었지만
규정 상 뛰는게 맞기 때문에 뛰었고, 아쉽게 졌습니다.
문제는 이 때 경기 직후, 여러 좌석에서 환호하는 소리와
박수소리, 인천 콜이 나오면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왜 나왔을까요? 개천 팬들이 몰래 들어와서 벌레마냥
지켜보다가 지들 이겨서 잔류했다고
몰상식한 짓 한겁니다.
그리고선 일부 인천 팬페이지는 그게 뭐가 문제냐면 쉴드.
뭐, 김도혁도 환호유도를 했던 부분에 대해서
서울 팬들은 더욱 더 혐오감을 가지게 만든 부분도 있죠.
더 쓰고 싶지만 그냥 이정도만 써도 이해 할 꺼 같네요.
작고하신 분에 이야기에 벌레이야기 쓰고 싶지 않네요.
Q3. 다른 팀들 반응은 어땠나요?
A.
기억나는 팀과 찾아본 팀들은 이정도입니다.
관계와 사이의 여부성을 떠나서, 고마웠던 부분이죠.
-끝으로 뉴비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저도 경기장에서는 본 적 없지만 티비로 봤던 선수고
매 해마다 다가오면 프로필사진을 다 김남춘으로
바꾸면서 나름대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팀에 대한 애정은 컸던 선수입니다.
이 문구만 기억해주세요.
서울의 봄 🌸
+
작고하신 이유는 유가족 분들이 부검을 원치 않으셔서
직접적 사인은 공개 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 추측이 오가지만, 공개 된 정확한 사유는 없습니다.
추천인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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