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투 히칼도 : 1편
:: 어린 시절의 영웅을 찾아서
나는 즉흥적이다. 그리고 나는 실행력이 빠르다.
언제 어디서나 뜬금없는 발상을 떠올리곤 하고,
그렇게 비롯된 발상이 내가 좋아하는, 내가 하고싶은 일이라고 기꺼이 생각된다면 일단 판을 키워 저질러보는 편이다.
1교시와 2교시 수업이 연이어 있는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졸음, 그리고 스페인어와 싸우며 연강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침대와 한몸이 되어 쉬고 있던 도중 느슨해진
사고회로에서 비롯된 꼬리의 꼬리를 무는 망상이 시작된다.
'이번 주말에 어디가지... 지난주 리스본 끝내줬지...'
'포르투갈 하니까 히칼도 떠오르네 요즘 뭐하고 살까..?'
'맞다 슛포러브같은 사람들 보니까 선수들 직접 만나던데'
'포르투갈이면 옆나라인데 그냥 만나러 가볼까...?'
'아 히칼도 인스타 하지? DM이나 보내봐야겠다'
'[web발신] 히칼도너는나를만나줘야한다나는FC서울팬이며...'
다시 생각해도 맥락따윈 없는 사고회로이나, 리스본 생각을
시작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내 몸은 어느새
자세를 고쳐잡고 히칼도를 향해 장문의 DM을 쓰고있었다.
히칼도, 그가 누구인가.
내가 FC서울의 경기를 처음 보기 시작했던 해인 2005년
포르투갈에서 서울로 이적해와 그해 도움왕 타이틀을 따냈으며,
2006년 리그컵 우승의 주역이 된 이후 2007시즌까지
3년간 76경기에 출전해 총 8골과 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2000년대 중반 FC서울의 전설적인 외국인 미드필더이다.
게다가 50번이라는 특이한 등번호, 동유럽과 브라질 선수들로
가득한 K리그 외국인선수 생태계에 등장한 포르투갈출신 선수,
결정적으로 차는 족족 상대 골문과 공격수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했던 킥력과 경기 내내 찰랑이는 금발의 긴머리까지.
5살이던 나의 뇌리에 그가 각인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유일무이한 캐릭터를 지닌 선수였다.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메시지를 써서 그에게 보낸 뒤,
다시 침대와 합체한 나는 언제 히칼도 생각을 했냐는 듯
다시 또다른 사고회로의 늪에 깊숙히 빠져든다.
그렇게 화요일이 수요일로 넘어가던 자정 무렵,
잠에 들기 전 스마트폰에 쌓인 알림을 확인하던 도중
내 인스타에 새로운 팔로워와 DM 한통이 와있는 것이 보인다.
Hello
I live in oporto (Portugal)
When you came here for sure I will meet you
It will be my pleasure
Take care
See you
어? 이왜진?
활발하게 작동하던 내 사고회로가 일순간 멈춘다.
약 5초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정리를 마친 뒤,
히칼도에게 곧장 답장을 보내 그의 초대에 응한다.
"히칼도 선생님 11월 첫째주 주말에 포르투로 가겠습니다.
금토일 3일 가운데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시간 날짜 위치
정해주시면 어떻게든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Hello
November 4th will be good for me too.
I Know a great Korean restaurant
and we can meet there at 20:00h ok!?
"엄마 나 히칼도 보러 포르투갈 한번 더 갈 것 같아."
그렇게 나의 어린시절 영웅을 향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 빈손으로 갈 수는 없기에
상술했든 나는 일단 일을 벌린 뒤 청사진을 그리곤 한다.
만약 히칼도와 재회하는 일의 주체가 FC서울의 프런트였다면
적어도 유명 축구 유튜버나 인플루언서정도만 되었어도
히칼도와 만남을 가지기 전 최소한의 계획은 세운 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겐 약 2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래도 16년만에 만나는건데 밥만 먹고 오기도 뭐하잖아'
히칼도의 입장에서도 그가 한국을 떠난 뒤 처음으로
그가 사랑받았던 팀의 서포터즈를 만나는 기회가 될 터인데,
뭐라도 준비해 그를 반드시 감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당찬 포부와 달리 현재 내 신분은 교환학생.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과제들과
주 2회 1교시를 비롯해 주중을 채운 대학교 강의 스케줄은
나 홀로 모든 준비를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위기를 타개할 검증된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
고민을 거듭하던 도중,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오른다.
"네 거기 북측광장이죠..?"
지난해 한차례 생방송 출연 이후 연을 맺었던
FC서울 팬 유튜브 북측광장측에 SOS를 요청한다.
"저 히칼도 보러갑니다."
"??????????????????????????"
"그러니 포스터와 롤링페이퍼 디자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맡겨만 주십쇼. 근데 저희도 부탁이 있습니다"
"...인터뷰 따오면 된다는거죠? 저도 맡겨만 주십쇼"
북측광장측에서 히칼도에게 선물할 포스터와 롤링페이퍼의
디자인을 전적으로 맡아주는 대신, 나는 북측광장 유튜브에
업로드될 히칼도와의 인터뷰를 진행해주기로 하는
사상 초유의 '서포터즈간 트레이드'가 성황리에 성사되었다.
히칼도와 만나는 날짜와 시간은 정해졌고,
이제 히칼도에게 전해줄 선물까지 윤곽이 나왔다.
남은 것은 이 반쯤 미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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