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투 히칼도 : 3편(완결)
:: 히칼도와의 만남, 그런데 온 가족을 곁들인.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 내 가족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어."
"응? 가족이라고?"
"나랑 둘이서 밥먹는거보다 오늘 가족 모임이 있어서
너를 여기 초대하는게 더 의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한국에서조차 남의 가족에게 초대받을 때엔 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기습적인, 그것도 지구 반대편의 가족 잔치라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섯 명 남짓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개인사정으로 참석 못한 히칼도의
아이들과 부인을 제외하고 모든 친척이 모인 자리라고 한다.
"이쪽은 한국에서 온 서울의 서포터즈 '강'이야."
스페인어가 포르투갈어와 상당부분 유사성을 띄고 있는 것에
감사함을 표한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6개월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이 전부이지만, 히칼도의 문장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단어와 상황의 맥락을 조합해 그가 말하는 바를 대략 유추한다.
오스마르가 아닌 히칼도,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먼저 스페인어를 써먹을볼 줄이야.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스페인어로 천천히 자기소개를 마친다.
내 소개를 마치니, 모임의 취지조차 모른채 이곳에 떨어진
내게 히칼도는 그제서야 왜 오늘 온 가족이 모였는지 말해준다.
"Feliz aniversarios!!"
알고 보니 오늘은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히칼도 친척의 생일.
생일파티 겸 식사를 즐기기 위해 포르투 곳곳에서 히칼도의
가족이 한데 이곳에 모인 것이다. 원래 나와 식사 이후 여기에
합류하려던 히칼도도 생각을 바꿔 나를 이곳에 부른 것이었다.
상황파악을 마친 내 앞으로 손편지가 담긴 종이가 전해진다.
"우리는 생일인 사람한테 편지를 써주고, 아래에 서명을 해."
손편지와 서명의 정체를 알려준 히칼도는 이내 내게
편지의 내용까지 직접 한줄 한줄 읽어준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고, 항상 건강하고, 소원이 모두 이뤄지고..."
언어만 다를 뿐, 지구 반대편에도 편지의 템플릿은 같나보다.
"너도 여기 아래 서명해!"
히칼도의 사인을 받으면 받았지, 여기서 사인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나 역시 편지 속 내용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 아래에 작게 서명을 마친다.
"몇살이야? 스페인어는 얼마나 배운거야?"
"스물 둘이에요, 스페인어는 한국에서 4개월 배웠구요."
히칼도의 인터뷰를 야심차게 시작하기도 전에,
오히려 내가 히칼도 친척들의 인터뷰 대상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 아니면 여기 나이로?"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던 도중, 깜빡이 없이 치고 들어온 기습적인 히칼도의 K-스타일 질문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
"여기 나이로 스물 둘이야. 한국 나이도 기억하고 있네?"
"물론이지. 빠른도 기억하고 있어."
그러고는 친척들에게 한국식 나이체계에 대해 막간의 강의를
시작하는 히칼도. 16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정도로 여전히
히칼도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한국문화가 내재되어있다.
"여기 있는 메뉴중에 아무거나 다 골라도 돼."
마치 명절 할머니댁에 온 듯, 혹은 그 이상급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온 서포터즈를 향해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라는 무수한 권유의 손길이 쏟아진다.
"여긴 생선 메뉴고, 여기는 고기 메뉴야"
"혹시 바칼라오 알아? 포르투에서 유명한 생선인데 먹어볼래?"
"바칼라오는 구워서 먹는게 가장 맛있지! 이거 먹어봐"
히칼도의 메뉴 소개를 시작으로, 주위에서는 각자 자신들이
보증하는 포르투 최고의 요리를 마구 추천하기 시작한다.
"어... 그럼 바칼라오 주문해도 돼요?"
"여기서 너가 먹고싶은거 다 주문해도 돼."
"맥주는 필요없어? 흑맥주? 그냥 맥주?"
"어.. 그럼 맥주도 한잔만 주문할게요."
한끼에 10유로(14000원) 안쪽으로 해결하곤 하는 내게
기본 20유로가 넘어가는 레스토랑 메뉴판 속 음식들은
그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잠시 뒤, 히칼도와 그의 친척들이 뭐라뭐라 대화를 하더니,
히칼도가 마구 웃으며 내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한다.
귓속말 이후 영어로 내게 질문하는 그의 친척.
"강, 네가 가장 좋아하는 포르투갈 클럽이 뭐야?"
"당연히 FC포르투죠. 다른 선택지가 있겠습니까"
"축하해 강, 넌 살아남았어."
"포르투의 선수들도 알고있어요, 메흐디 타레미, 페페..."
페페를 말하는 순간, 테이블 위 종이에 펜으로 그림그리기에
여념이 없던 조카마저 번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우리 애가 페페를 좋아하거든. 그렇지?"
만약 유럽 도시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그 도시 축구 클럽에
소속되어있는 유명 선수 한두명은 외워가길 바란다.
혹시 모르지 않나, 식당에서 맥주라도 공짜로 얻어마실지.
:: 고마워요 내 영웅.
본격적인 식사가 나오기 전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스페인에서부터 들고 온 선물들을 하나씩 주섬주섬 꺼낸다.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몇가지 선물을 준비했어.
이건 네가 한국에서 뛸 때 모습을 담은 포스터이고,
이건 한국에서 서울의 팬들이 직접 적어준 롤링페이퍼,
마지막으로 이건 서울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는 셔츠야"
계속해서 나오는 선물에 히칼도의 눈이 점점 커진다.
포스터를 보며 16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지 생각에 잠긴 히칼도.
그 사이 롤링페이퍼는 테이블 이곳저곳을 돌며
히칼도는 물론, 히칼도의 온 가족에게 차례대로 보여진다.
"저때보다 많이 나이가 들었지? 젊었을 때가 기억나네...
(이)민성... (김)병지... 샤프(김은중)... 주영...
샤프는 한국 U-20 대표팀 감독이고 주영은 아직 선수지?
맞다 원권이 대구의 감독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어.
원권은 정말 좋은 친구였고 선수였는데 말이야."
"응, 너와 함께 뛰고 있던 시기의 선수들이 이제 하나둘
팀의 베테랑이 되거나 코치, 감독이 되어있네. 시간 빠르지?
맞다, 아직 우리 훈련장은 그대로 구리에 있어. 기억해?"
"오 당연히 기억하지! 내 집도 구리에 있었다구.
나 구리에서 먹던 한국 쌀밥이 진짜 그리워."
"아줌마~ 밥주세요~ 많이 드세요~"
자기 입으로는 아직 기억하고있는 한국어가 스무단어 남짓이라
내게 밝힌 히칼도이지만,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는 그의 한국어를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0 하나는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포스터와 함께 16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테이블에는 하나둘 메인 메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조개와 오징어, 문어같은 싱싱한 해산물부터
마치 시래기해장국을 연상시키는 비주얼의 수프,
포르투를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바칼라오(대구) 요리까지.
넓던 테이블은 순식간에 음식들로 가득 매워진다.
"어서 먹어봐! 혹시 입맛에 안맞으면 얘기하고!"
각종 포르투갈 요리들이 모두 나오고 난 뒤,
다시 한 번 온 테이블의 시선은 나에게로 집중된다.
요리들이 지구 반대편 손님의 입맛에 안 맞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온 가족의 모습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숟가락을 들기를 기다리던 내가 가장 먼저 음식을 맛본다.
"¿Te gusta?"
"¡Me gusta mucho!"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대구의 식감에 엄지가 쥐어진다.
그제서야 안심한 듯 식사를 시작하는 히칼도와 친척들.
각자의 취향대로 차례대로 테이블 위 메뉴들을 공략해가며
언제 다 먹나 싶었던 음식들을 점차 비워간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가 저녁식사를 다 마쳐갈 때 즈음,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생일 케이크와 샴페인이 나온다.
"한국에서 젊은 사람은 윗사람과 술을 마실 때 술잔을 받은 뒤
한손으론 술잔을 가리고 고개는 옆으로 돌려서 마셔야해."
샴페인이 나오자, 빈 술잔을 든 히칼도는 직접 시범까지
보여가며 한국의 주도를 온 가족에게 전파한다.
"아냐 아냐 여기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고"
술잔을 받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내게,
히칼도는 마구 웃으며 유럽에선 편하게 술을 마시라고 한다.
디저트 접시가 모두 비워져갈 즈음,
히칼도에게 조심스레 본격적인 인터뷰를 요청한다.
식당측의 협조까지 얻은 덕에 비어있는 옆 테이블을 활용,
식기를 치우고 포스터를 벽에 기대어 조촐한 장식을 마친 뒤,
카메라의 구도를 세팅해 한국으로부터 받아온 마지막 미션인
'히칼도와의 인터뷰'를 문제 없이 마무리한다.
"우리 아들이랑 딸, 아내가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들이랑 아내가 너를 보고싶다고 했거든. 특히 아내는
아직도 한국을 너무 그리워하고, 서울에 언제든 다시 오고파해."
"혹시 구단한테 초청받거나 한 적은 없어?"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하하.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네가 구단에 말 좀 해줘."
보고 있나 프런트. 레전드가 한국행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8시에 시작한 우리의 짧은 만남은 11시가 다 되어
어느덧 마무리될 시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가는 식당은 점차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 역시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외투를 입는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봤으면 좋겠다. 내가 공항까지 마중나갈게!"
"다음 만남은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한국에서 반드시 다시 보자는 간절한 기약을 한 뒤,
나 역시 배낭과 카메라 등 가져온 짐을 주섬주섬 정리한다.
"맞다, 가기 전에 다 같이 사진이라도 한장 찍을까요?"
계산을 위해 온 웨이터에게 카메라를 건내 함께 사진을 찍는다.
나와 히칼도, 그리고 그의 온 가족이 함께 담긴 사진 한 장.
내 어릴적 영웅에 대한 추억은 16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키가 훌쩍 자란 나와 연륜이 훌쩍 쌓인 히칼도의 만남을 통해
가히 오랜만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obrigado meu herói.
(고마워요 내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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