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탈북 스토리.txt
일단 난 당연히 한국에서 태어났고
내 어머니도 한국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임 ㅋㅋ
외할아버지때가 대대로 북한 평안북도에서 학교를 운영하셨는데, 여기가 북중 국경 지대임
이유는 모르겠지만 태평양 전쟁 시점에 중화민국 톈진으로 이주를 했었다가, 해방후에 다시 조선(당시는 한국도 북한도 없으니)으로 귀국 했어
그런데 당시 평안도는 북한 내에서 기독교 세력이나 지주들이 많았고, 대부분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몰수 당하거나 살해 당하던 시대 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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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가는 그때 한국으로 피난을 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굉장히 북한을 증오하고 싫어하시더라구, 심지어 첫째 할아버지는 서울 해방 포스터 붙이다가 인민군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고
둘째 할아버지가 내 직계 할아버지인데 중학교때 한국전쟁 공군으로 참전 하셨고, 막내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장교로 참전 하셨어
다 잃고 남쪽으로 내려온 터라 정말 아무것도 없이 가난했고, 구두 닦이부터 전쟁 참전까지 별의 별일 다 하면서 돈을 모으셨는데 그 동기부여의 우일한 원천이 그냥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던게 이유였어, 그러나 건국 직후 한국 영화계는 아무 인프라도 없는 허허벌판이나 다름 없었고 돈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
아무튼 언론사에서 일 하다가 영화계 사람들을 여럿 알게되고, 4.19 혁명 직후에 기존에 일제시대 직후부터 있던 영화협회가 한국 전쟁으로 사실상 망하자, 할아버지가 우리끼리 다시 세우자고 의기투합해서 세운게 한국 영화 평론가 협회라는 단체였고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부임하셨어. 뭐 그때가 시대가 시대인만큼 통제도 많았고 작은 할아버지가 찍은 영화는 10년동안 상영금지 처분 받음 ㅋㅋㅋㅋㅋ ㅠ
시대가 흐르며 민주화도 되고, 어느정도 영화 산업이 한국에 자리 잡은 뒤에는 한예종이랑 서울예대, 중앙대에서 교수 일 하시면서 제자분들 양성 하시다가 2001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병원에서 완성해야 할게 있다며 일만 하셨다고 하더라고, 동료분들은 그 이후에 부산 국제 영화제를 따로 개설하셨고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각각 현충원이랑 파주에 묻히셨는데,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더 눈물이 나고, 열악한 상태에서 꿈을 이룬 할아버지를 보며 난 남탓 사회탓 환경탓 하면 안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
우리가 누리는 사회의 이 모든게 당연하게 아니라 정말로 이전 세대의 여러 사람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룩해놓은 것이란걸 항상 느끼면서 감사하게 되더라
+ 별개로 모태신앙인데 평안도 쪽이 기독교 집안이 매우 많다고 하더라구. 아마 그 영향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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