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니 어제는 1년 중 가장 슬픈 날.
축구가 끝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있었지만 축구팬들에게 공이 멎고 피치가 차갑게 식는다는 것만큼 아쉬운 일이 없죠. 다른 종목의 욘스긴 하지만 김용수 전 중앙대 야구부 감독은 선수 시절 우승을 확정짓기 직전에 "LG가 1등하는 건 기뻤지만 이 공을 던지면 야구가 끝나서 허무했다"고 하더라고요. 결말이 트로피인 사람도 그런데, 내내 힘든 일만 있던 우리는 어떻겠어요. 더 허탈하지.
한 해 내내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을 겪어도 중간중간 등산하다 마시는 물처럼 보람 있는 순간이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문자 그대로 고생만 하는 바람에 다들 괴로우실 겁니다. K리그 개막 때부터만 해도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1월 케다 FA와의 ACL 플레이오프부터 치면 거의 한 해의 전부를 과몰입하고, 싸우고, 울고, 괴로워하고, 아파했던 존재가 우릴 힘겹게만 해놓고 잠시 멈춘다니 참 마음이 허합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시즌이니 끝나고 보면 차라리 좀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조금 전 봤던 광경이 워낙 눈 뜨고 못 봐줄 것들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고 한숨만 나옵니다. 그건 결국 아무리 거지같아도 축구는 좀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일 거에요.
한 번 지면 다음 경기 잘하면 된다고 위로하면 됩니다. 연패에 빠지면 언젠간 비가 그치겠지 하고 지붕 밑에 앉아있으면 됩니다. 언젠간 지나가니까요. 하지만 시즌이 끝나는 날엔 몇 달간은 위로받고 회피할 구석조차 없이, 그리고 욕할 거리조차 없이 그저 추워하면서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외로워하면서 언제 3월 되나, 언제 잔디 나고 선수들 뛰어다니나 기다리는 거밖에 없어요. 그리움의 시간입니다. 여기서 가끔 안부나 전하면서 빨리 지나가버리면 좋겠네요.
올해의 모든 없애고 싶은 순간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축구를 향해 떠납니다. 잠깐 잠도 자고 쉬다가 보면 FC서울은 우리를 2021시즌 K리그1이라는 가본 적 없는 곳에 내려줄 겁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들이 따스한 햇살과 훈풍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일 걸 바라진 않습니다. 최소한 2020년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모두가 느꼈습니다. 2018년의 그 치욕도 결국 봄바람이 됐구나. 우리의 2021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지옥보다 더했던 어제까지의 일들을 2021년을 통과하고 나선 기억 저편으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제가 위안의 시작일 수도 있겠네요.
내년엔 뭐라도 나아질 거라고 근거 없이 웃으면서 몇 달씩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 웃음이 몇 달로 끝나지 않고 다음 해 12월까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비록 바닥을 보고 실망만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기대를 접은 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다들 여기에 남지 않았겠죠.
가장 힘든 하루가 지났습니다. 상사는 PT를 완전히 말아먹어 놓고 사과 한 마디 없이 덤터기를 씌웠고, 오늘이 예정일이라던 택배는 자정이 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필요한 물건이었는데도. 실적부진으로 직장이 위기라는 소문이 계속 오가는 와중에 저녁엔 더없이 절친한 친구가 먼 길을 떠났다는 전화도 받았습니다. 화를 내고, 욕도 하고, 한숨을 팍팍 쉬다가 결국 펑펑 울면서 누웠습니다.
그래도 눈을 감으면 내일이 오겠죠?
내일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한 잠 자고 나면 터진 일을 봉합해야겠다, 택배 회사에 전화라도 걸어서 오게 만들어야겠다, 상황을 자세히 듣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영전에 조금 늦게나마 가장 좋아하던 걸 바쳐야겠다. 그렇게 오늘보다 나은 하루 만들어봐야겠다 하면서 우리 모두는 잠에 듭니다.
눈을 감습니다. 내내 안 좋은 감정을 소모하기만 했으니 기운이 빠져서라도 뒤척이거나 멀뚱거리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거에요.
내일 아침 창으로 스며드는 햇빛은 분명 오늘보다 밝을 겁니다.
내년의 FC서울은 분명히 올해보다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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