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서울 역사관
  •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1990년대

[Seoul Player] 빅토르의 FC서울 통산 기록.JPG

title: 뗑컨Nariel 201

2

1
https://fcseoulite.me/history/13258564 복사

[정리] FC서울 선수들의 개인 통산 기록 게시글 모음.TXT

https://blog.naver.com/asdike/221738220034

(사진=경향신문)


*프로필

-성명: 빅터 샤카 (Victor Shaka)

-K리그 등록명: 빅토르

-국적: 나이지리아

-생년월일: 1975년 5월 1일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0kg

-포지션: 최전방 공격수


*FC서울 이력사항

-안양 LG 치타스(現 FC서울) => 1997/04~1999/07


*FC서울 주요 성적

K리그1 8위 => 1998

리그컵 3위 => 1998(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

FA컵 우승 => 1998







공유스크랩
바르고 고운말을 사용해주세요.
best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2.09.21. 14:11
빅토르는 1997년 4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안양LG치타스(現 FC서울)에서 활약했던 나이지리아 공격수이며 1998 FA컵 우승 멤버 중 한명입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의 일원이었고 유럽무대에서도 활약했던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97년 7월 29일 경향신문 기사를 비롯해 각종 언론 기사들에서 수집한 빅토르의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빅토르는 1995, 1996년에 Nigerdock라는 팀에서 나이지리아 1부리그 득점왕을 2년 연속으로 달성했던 특급 유망주였습니다. 이 때 그는 ‘소리없는 저격수(Slient Operator)’, ‘나이지리아 반바스텐’ 등의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올림픽 대표팀에도 선발됐지만 오른쪽 종아리 부상으로 본선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나이지리아 대표팀이 본프레레 감독의 지휘하에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빅토르의 친구였던 은완코 카누도 인터밀란으로 이적했습니다. 친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화려한 영광을 거머쥐었지만 정작 빅토르는 그러지 못했던 셈이죠.

그래도 빅토르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1997 시즌 전반기에 트라브존스포르로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4월에 이적료 30만 달러(당시 2억 8000만원), 연봉 3만달러(당시 2700만원)에 안양 LG 치타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절치부심한 빅토르는 1997 시즌에 20경기에서 6골 2도움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한국에 왔으니 한국선수들과 똑같이 먹겠다며 김치와 밥을 먹는 등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8 시즌엔 36경기에서 8골 2도움을 기록했고 FA컵에선 전경기에 출전하며 안양LG의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르는 1999 시즌 전반기에 15경기 1골 1도움으로 부진했고, 결국 여름이적시장에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11경기에서 7골 3도움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후 빅토르는 계속 부진을 거듭했고 부산 아이콘스(現 부산 아이파크), 홍콩 해피밸리 AA, 홍콩 레인저스 등을 거쳐 2004년에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참고로 1997년 7월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빅토르는 아내 아다(20)와의 사이에서 2살배기 아들 마이클, 14개월된딸 조세핀 등 1남 1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2001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이지리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때는 나이지리아 대표팀 선수 구성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뛰었던 빅토르가 대타로 선발된 것이었고, 빅토르는 이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고 합니다.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2.09.21. 14:11
빅토르는 1997년 4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안양LG치타스(現 FC서울)에서 활약했던 나이지리아 공격수이며 1998 FA컵 우승 멤버 중 한명입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의 일원이었고 유럽무대에서도 활약했던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97년 7월 29일 경향신문 기사를 비롯해 각종 언론 기사들에서 수집한 빅토르의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빅토르는 1995, 1996년에 Nigerdock라는 팀에서 나이지리아 1부리그 득점왕을 2년 연속으로 달성했던 특급 유망주였습니다. 이 때 그는 ‘소리없는 저격수(Slient Operator)’, ‘나이지리아 반바스텐’ 등의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올림픽 대표팀에도 선발됐지만 오른쪽 종아리 부상으로 본선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나이지리아 대표팀이 본프레레 감독의 지휘하에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빅토르의 친구였던 은완코 카누도 인터밀란으로 이적했습니다. 친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화려한 영광을 거머쥐었지만 정작 빅토르는 그러지 못했던 셈이죠.

그래도 빅토르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1997 시즌 전반기에 트라브존스포르로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4월에 이적료 30만 달러(당시 2억 8000만원), 연봉 3만달러(당시 2700만원)에 안양 LG 치타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절치부심한 빅토르는 1997 시즌에 20경기에서 6골 2도움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한국에 왔으니 한국선수들과 똑같이 먹겠다며 김치와 밥을 먹는 등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8 시즌엔 36경기에서 8골 2도움을 기록했고 FA컵에선 전경기에 출전하며 안양LG의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르는 1999 시즌 전반기에 15경기 1골 1도움으로 부진했고, 결국 여름이적시장에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11경기에서 7골 3도움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후 빅토르는 계속 부진을 거듭했고 부산 아이콘스(現 부산 아이파크), 홍콩 해피밸리 AA, 홍콩 레인저스 등을 거쳐 2004년에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참고로 1997년 7월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빅토르는 아내 아다(20)와의 사이에서 2살배기 아들 마이클, 14개월된딸 조세핀 등 1남 1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2001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이지리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때는 나이지리아 대표팀 선수 구성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뛰었던 빅토르가 대타로 선발된 것이었고, 빅토르는 이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고 합니다.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