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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Player

[FC서울 역대 주요 선수] 2. 1980년대 후반기 선수들 (럭키금성)

title: 뗑컨Nariel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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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한(1985~1991) => 156경기 24골 15도움

-우승기록: K리그1 2회(1985, 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1988)

-개인수상: K리그1 MVP 1회 (1990), K리그1 베스트일레븐 2회(1988, 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베스트일레븐 1회(1988)

-평가: FC서울 5대 주장이자 FC서울 역사상 2번째로 K리그 MVP를 차지한 선수. 입단 첫해인 1985 시즌에는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리그 5경기 출전에 그치며 팀의 우승에 큰 힘을 보태지 못했다. 1986 시즌에는 K리그1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며 팀의 준우승을 지켜봐야했다. 하지만 1988 시즌부터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K리그1과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89 시즌과 1990 시즌에는 팀의 주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91 시즌을 앞두고 LG 치타스(現 FC서울)는 최진한과의 재계약 협상과정에서 최진한을 푸대접했고 이에 상처를 받은 최진한은 1991 시즌 전반기에 부진에 빠졌다. 그러자 LG 치타스 프런트는 여름이적시장에서 최진한을 유공 코끼리(現 제주 유나이티드)로 강제로 트레이드 시켰고 최진한은 LG 치타스와 불미스럽게 이별했다.

(P.S: 최진한의 기록 중 1989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경기의 출전기록은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4경기의 도움기록도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최종덕(1985): 17경기 1골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85)

-개인수상: 없음

-평가: 한국축구 대표팀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아시안컵 준우승을 달성했던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수비수.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는 현역 은퇴 1년을 앞두고 합류하여 K리그1 우승에 공헌했다.

 

 

차상광 (1986~1991, 1995): 151경기 164실점 47클린시트 

-우승 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989), K리그1 우수골키퍼상 1회(1989)

-평가: 1990 K리그 우승의 주역이자 1989 K리그 최고의 골키퍼 . 입단 초기에는 김현태와 번갈아가며 경기에 출전했으나 1989 시즌부터 1991 시즌까지는 김현태를 밀어내고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1989 시즌에는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90 시즌에는 리그 28경기 23실점으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이후 1992 시즌에 포항제철 아톰즈(現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했다가 1995 시즌에 다시 팀에 돌아왔으나 1년만에 팀을 퇴단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차상해는 1989 시즌과 1996시즌에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과 안양 LG 치타스(現 FC서울)에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포항제철 아톰즈에서는 1993 시즌에 K리그1 득점왕을 차지했다.

(P.S: 차상광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5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차상광의 출전기록은 최대 156경기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차상광이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멤버인지 여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조민국(1986~1992): 144경기 16골 12도움

-우승 기록: K리그1 1회(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 (1988)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 (1986), 전국축구선수권대회 MVP 1회(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베스트일레븐 1회(1988) 

-평가: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최고의 선수. 대우 로얄즈(現 부산 아이파크)와의 결승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90 시즌에도 23경기에 출전하며 K리그1 우승에 공헌했고 대표팀에서는 2번의 월드컵에 출전하며 위명을 떨쳤다. 1992 시즌 이후에는 일본의 후제다 브룩스(現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활약하다 은퇴했다. 

(P.S: 조민국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5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조민국의 출전기록은 최대 149경기까지 늘어난다)

 

 


구상범 (1986~1993): 166경기 15골 13도움

-우승 기록: K리그1 1회(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 (1988)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87),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베스트일레븐 1회(1988)

-평가: 20세기 FC서울 최고의 왼쪽 윙백 중 한명.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와 LG치타스(現 FC서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월드컵, 아시안컵, 올림픽, 아시안게임에 모두 출전했다. 하지만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1988 시즌부터 1990 시즌까지는 럭키금성 황소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다. 특히 1990 시즌에는 팀이 리그에서 우승했음에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 선발로 인해 9경기 출전에 그쳤다.

(P.S: 구상범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구상범의 출전기록은 최대 169경기까지 늘어난다)

 

 

박윤기(1987): 13경기 2골

-우승기록: 없음

-개인수상: 없음

-평가: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K리그1 1호골을 득점했으며 K리그 초대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스타플레이어.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는 선수생활 은퇴를 앞두고 1년간 활약했다. 세간에는 1987년 10월 31일 포항전에서 K리그 통산 1000호골을 터트린 선수로 알려져 있으나 해당 기록은 K리그와 리그컵을 합산한데다 일부 경기들이 누락되어 있어서 논란이 존재한다.

 

 

 

최순호(1988~1991): 34경기 4골 5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1988)

-개인수상: 없음

-평가: 1980년대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으나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는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1988 서울올림픽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인해 대표팀 차출이 잦았던 탓에 정작 럭키금성에서는 경기를 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럭키금성이 K리그1을 제패하던 1990 시즌에도 최순호는 리그 8경기에서 1골 2도움에 그쳤다. 그나마 대표팀 차출이 없었던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우승에 일조했다.

(P.S: 최순호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의 기록이 확인되면 최순호의 출전기록은 최대 35경기까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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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07. 14:26
3편은 오늘중으로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이영진은 1986년부터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활약했지만 1990년대 활약상이 더 뛰어나서 1990년대 선수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글에서도 언급이 된 부분이지만 1980년대~1990년대 선수들의 기록을 평가할 때는 지금 선수들과 다른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데다가 훈련시스템과 인프라가 후진적이어서 선수생명이 짧았습니다. 지금은 40대 축구 선수들도 종종 볼 수 있지만 80~90년대는 30살만 넘어가도 노장취급을 받았죠.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23살이 되어서야 프로에 진입했고, 그 중에서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K리그 경기에 뛰지도 못한채 A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으로 반강제로 차출돼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1980년대~1990년대 선수들은 지금 선수들보다 기록지표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는 점을 항상 감안해야합니다.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07. 14:26
3편은 오늘중으로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이영진은 1986년부터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활약했지만 1990년대 활약상이 더 뛰어나서 1990년대 선수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글에서도 언급이 된 부분이지만 1980년대~1990년대 선수들의 기록을 평가할 때는 지금 선수들과 다른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데다가 훈련시스템과 인프라가 후진적이어서 선수생명이 짧았습니다. 지금은 40대 축구 선수들도 종종 볼 수 있지만 80~90년대는 30살만 넘어가도 노장취급을 받았죠.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23살이 되어서야 프로에 진입했고, 그 중에서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K리그 경기에 뛰지도 못한채 A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으로 반강제로 차출돼야 했습니다. 이로인해 1980년대~1990년대 선수들은 지금 선수들보다 기록지표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는 점을 항상 감안해야합니다.
망나뇽 2021.02.09. 23:58
와 최순호선수가 럭금소속으로 월드컵뛰었었군요ㅋㅋㅋ
조민국 이름도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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