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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Player

[FC서울 역대 주요 선수] 3. 1990년대 전반기 선수들 (LG치타스)

title: 뗑컨Nariel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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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cseoulite.me/history/4634084 복사



이영진(1986~1995, 1997): 231경기 16골 28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1988)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 (1991)

-평가: 하대성, 오스마르, 기성용, 고명진과 함께 FC서울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명.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FA컵의 전신)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했으며, 1991 시즌엔 K리그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했다.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수비수를 모두 볼 수 있었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상무,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잠깐 몸담았던 것을 제외하면 FC서울에서만 10년을 몸담았던 전설적인 선수이다.


차광식 (1988~1992): 103경기 2골 4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개인수상: 없음

-평가: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럭키금성 황소와 LG치타스에서 활약했던 선수.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모두 볼 수 있었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1990 시즌에는 29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K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윤상철, 최진한 등 당대 스타플레이어들에 비해 명성은 부족했지만 FC서울에서 100경기 이상 출전했기에 그가 FC서울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P.S: 차광식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5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차광식의 출전기록은 최대 108경기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차광식이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지 여부는 현재 확인이 불분명하다 )



최영준(1988~1994): 183경기 3골 2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1988)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90)

-평가: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8년에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였고, 1995 시즌에 현대 호랑이(現 울산 현대)로 이적하기 전까지 180여경기에 출전해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 1990 K리그1 우승과 1988 전국축구선수권 우승에 공헌했고, K리그 베스트일레븐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구가했다. 다만 1992년에 구단과 결탁하여 자신의 재산을 허위신고해 방위병 소집을 면제받아 병역을 기피했던 이력이 있다.  

(P.S: 최영준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최영준의 출전기록은 최대 186경기까지 늘어난다)



조병영 (1988~1997): 181경기 3골 1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개인수상: 없음

-평가: FC서울을 대표하는 원클럽맨 레전드이며. 1997년엔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88년에 입단해서 1997년에 퇴단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FC서울 역대 최고 레전드인 윤상철의 입단연도 및 퇴단연도와 겹친다.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고, 현역시절에는 중앙수비수와 좌우풀백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멀티플레이어였다.

(P.S: 조병영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7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조병영의 출전기록은 최대 188경기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조병영이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지 여부는 현재 확인이 불분명하다)



윤상철(1988~1997): 306경기 102골 32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1988)

-개인수상: K리그1 득점왕 2회(1990, 1994), K리그1 도움왕 1회(1993) K리그1 베스트일레븐 4회( 1989, 1990, 1993, 1994), K리그1 감투상 1회(1993)

-평가: FC서울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이자 20세기 FC서울 최고의 선수. 말년에 호주리그에서 2년 간 뛴 걸 제외하면 평생 서울에 충성한 준원클럽맨이다. 건국대학교 때 무릎수술을 받아서 프로 생활 내내 무릎 연골이 없는 상태로 뛰어야했음에도 FC서울 역사상 최초로 300경기 출전과 100골을 달성했다. 비록 말년에는 구단으로부터 임의탈퇴를 당해 팀에서 쫓겨났으나 여전히 FC서울을 응원하고 있으며 서울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P.S: 윤상철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4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윤상철의 출전기록은 최대 310경기까지 늘어난다)



최태진(1989~1992): 107경기 8골 3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 (1990)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90), K리그1 모범상 1회(1990)

-평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럭키금성 황소와 LG치타스에서 활약했던 오른쪽 풀백. 1990시즌엔 29경기에서 4골 2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으며 K리그 우승, K리그 베스트 일레븐, 감투상을 차지했다. 월간축구는 1990년 12월호에서 최태진에 대해 "장거리 슈팅의 귀재. 탄탄한 수비력과 오버래핑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공-수 플레이에서 매게임마다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투혼을 발휘한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P.S: 최태진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2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최태진의 출전기록은 최대 109경기까지 늘어난다)



이영익(1989~1997) => 195경기 7골 6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89)

-평가: FC서울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원클럽맨 레전드. 은퇴 당시 FC서울 최다 출전 3위였다. 중앙 수비수, 오른쪽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가 모두 가능했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1990 K리그 우승 당시 핵심이었다. 

(P.S: 이영익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이영익의 출전기록은 최대 196경기까지 늘어난다)



김동해(1989~1990, 1992~1995): 140경기 9골 10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93)

-평가: 럭키금성 황소와 LG 치타스에서 6년 동안 활약했던 공격형 미드필더. 1991년에는 방위병, 1992년 1월부터 9월까지는 상무에서 군복무를 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불면증으로 인해 선수생활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으나 1993 시즌에 K리그 베스트일레븐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P.S: 김동해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김동해의 출전기록은 최대 143경기까지 늘어난다)



이인재 (1989~1997): 138경기 12골 10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없음

-평가: FC서울을 대표하는 원클럽맨이며 1989 시즌엔 '럭키금성의 해결사'로 불리기도 했던 유망주. 오랫동안 팀에 몸담은 원클럽맨임에도 출전기록이 적다. 그래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FC서울에 몸담았던 원클럽맨 한태유와 비슷한 점이 있다. 1989 시즌에 K리그에서 30경기 5골 3도움이라는 좋은 기록을 보여주며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다.

(P.S: 이인재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이인재의 출전기록은 최대 141경기까지 늘어난다)



김삼수(1989~1993): 111경기 4골 3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없음

-평가: 5년 동안 럭키금성 황소와 LG 치타스에서 활약했던 선수. 울산 현대 시절에는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을 차지하기도 했고, FC서울에선 K리그 우승 1회 및 준우승 2회, 리그컵 준우승 1회를 차지했다. 울산에서의 활약상에 비해 서울에서의 활약상은 아쉬운 편이다.

(P.S: 김삼수의 FC서울 통산 기록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2경기가 기록미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해당 경기들의 기록이 확인되면 김삼수의 출전기록은 최대 113경기까지 늘어난다)



박정배(1990~1993): 113경기 9골 5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92)

-평가: 1990 K리그 우승을 이끈 중앙 수비수. 데뷔 첫해인 1990년엔 신인임에도 26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일조했고 1992 시즌엔 K리그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했다. 팀에 몸담은 기간은 짧았지만 준수한 활약을 펼쳤던 선수



최대식 (1990~1995): 168경기 8골 28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K리그1 도움왕 1회(1990)

-평가: 윤상철의 영혼의 파트너. 1990 K리그 도움왕을 차지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20세기 FC서울 최고의 특급 도우미였다.



김상훈(1990~1995): 63경기 10골 1도움

-우승기록: K리그1 1회(1990)

-개인수상: 없음

-평가: 승부조작으로 축구계에서 퇴출된 범죄자. 1990년에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 클럽축구무대에 데뷔해서 6년 동안 활약했다. 현역 시절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고 1995 시즌이 끝난 이후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대 축구부에서 감독 재임 중에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적발되어 2010년에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영구제명 징계를 받았다. 참고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에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에서 활약했던 국가대표 선수 김상훈과는 동명이인.  



임근재(1992~1994): 85경기 18골 4도움

-우승기록: 없음

-개인수상: K리그1 득점왕 1회(1992), K리그1 베스트일레븐 1회(1992)

-평가: 데뷔시즌인 1992 시즌에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던 선수. K리그 역사에서 성인무대 데뷔 시즌에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는 임근재(1992)와 노상래(1995)가 유이하다. 또한 FC서울 역사에서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는 피아퐁, 윤상철, 임근재, 데얀 등 4명 뿐이다. 다만 데뷔 시즌을 제외하면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철우(1992~1994): 62경기 77실점 16클린시트

-우승기록: 없음

-개인수상: 없음

-평가: FC서울 역대 골키퍼들 중 승부차기를 가장 잘 막았던 선수. 1993 시즌엔 K리그 24경기에서 24실점 10클린시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K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K리그에서는 후반전이 무승부로 끝난 경우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리는 제도가 한시적으로 시행했는데 박철우는 이때 승부차기로 진행된 9경기에서 8승 1패를 거두며 승부차기의 신으로 위용을 떨쳤다.



서정원(1992~1997): 90경기 26골 9도움

-우승기록: 없음

-개인수상: 리그컵 득점왕 1회(1997)

-평가: FC서울 역사상 최초의 리그컵 득점왕. FC서울 역사에서 리그컵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는 서정원(1997)과 데얀(2010)뿐이다. 6년 동안 팀에 몸담았지만 잦은 대표팀 차출, 방위○○○분으로 군복무 병행 등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소화하진 못했다. 그리고 프랑스리그 진출 이후 국내 복귀 과정에서 안양LG 대신 수원에 입단하였고, 이로 인해 추후 안양LG에 3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배상해야했다. 서울팬들에게는 '데얀 이전의 최악의 배신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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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09. 23:38
분량이 생각보다 많아져서 글을 늦게 올렸습니다. 다시 학업으로 경황이 없어져서 앞의 1,2편처럼 선수들마다 개별적인 평가는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연휴인 금요일까지 선수들 기록만 쫙 올리고 선수별 평가글은 나중에 설라 돌아왔을 때 쓰겠습니다ㅜㅜ

다만 이 문서에서 김상훈에 대해서만은 유일하게 평가를 적었습니다. 이 인간은 10년 전에 승부조작으로 축구계에서 영구제명이 됐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보니 혹여 김상훈을 구단에 헌신한 추억의 인물로 착각하는 분들이 계실까 우려가 되더군요.

관련기사-https://www.google.com/amp/s/m.mk.co.kr/news/sports/view-amp/2010/04/212287/
망나뇽 2021.02.09. 23:47
Nariel
세심한 배려좋네요👍
망나뇽 2021.02.09. 23:51
이인재선수 부분 19990으로 오타있네요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FA전신인가요? 기록관리가 잘 안되어있나보네요ㅠㅠ 기록이 다시 확인될 가능성이 있나요? 아니면 그런 사례가있었나요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10. 00:49
망나뇽
오타지적 감사드립니다. 반영해서 수정했습니다 :)

그리고 전국축구선수권대회는 FA컵의 전신대회인데 FC서울을 비롯한 K리그 팀들은 1988년과 1989년에만 1군을 내보냈고 나머지 대회들은 불참하거나 2군을 내보냈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는 워낙 옛날 대회라 경기기록부가 전산화가 안 되어 있어서 선수들의 기록은 뉴스기사나 사진 등을 통해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리된 기록도 저랑 다른 서울팬분들께서 옛날 월간축구 잡지랑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등을 뒤져가며 겨우 찾아낸 것입니다ㅠㅠㅠ물론 다른 자료들이 추가로 발굴된다면 기록들이 추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전의 윤상철의 선수권대회 기록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자료를 발굴해서 출전기록을 1경기 추가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문지라 미완성된 기록들이 추가로 보완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망나뇽 2021.02.10. 01:04
Nariel
FA전신인데 우승 기록 승계를 안하는것이 정말 아쉽네요..
구단이나 연맹이 공식적으로 집계 하는것이 아니고 나리엘님 비롯한 팬들이 직접 찾는다는게 너무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대단하시고 멋지십니다!
혹시 구단이나 연맹측에게 공식적인 집계를 부탁하거나 집계가 어려우면 자료 접근에 대해 도움을 요청해보신적은 없으신가요? 어쨌든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데 구단이 직접 나서지 않고 팬들이 부실한 자료들을 뒤져가며 한다는게 마음이 안좋네요..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10. 01:09
망나뇽
축협에서는 따로 전산화를 안 하고 있고 구단측에서도 자료를 갖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압니다.

저때는 30년 전인 럭키금성 시절이었고 축구계에서 기록에 대한 관리의식도 부족하던 시대여서요ㅠ
망나뇽 2021.02.10. 01:17
Nariel
역시나 예상했던대로군요.. 그렇다면 상기하신 출전기록 등도 비공식 기록이라고 할수있는데 구단에서는 언론 등에 배포할때는 어떤식으로 공시할지 궁금하네요..
가령 이번 시즌 박주영 선수가 윤상철 선수의 기록을 넘는다고했을 때, 공식적인 기록도 없는데 어떻게 기준을 삼을지.. (생각해보면 아예 언론 배포따윈 하지 않을수도 있겠군요) 너무 안타깝고 화가나네요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1.02.10. 01:22
망나뇽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기록들은 구단 내에서도 공식기록으로 간주하는 등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데얀이 306경기 찍었을 때 구단 통산 최다출전 기록 달성했다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린 적이 있습니다. 박주영 선수가 200경기 달성했을 때는 구단 홈페이지에 선수들 출전 기록이 정리된 표까지 첨부해서 올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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