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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Seoul Player] 이상래의 FC서울 통산 기록.JPG

title: 뗑컨Nariel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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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FC서울 선수들의 개인 통산 기록 게시글 모음.TXT

https://blog.naver.com/asdike/221738220034

(사진출처=FC서울 온라인 박물관)


*프로필

-성명: 이상래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61/07/12

-사망: 2013/08/30 (향년 52세)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2kg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학력사항: 서울 우이초등학교, 숭덕중학교, 중앙고등학교


*FC서울 이력사항

1984/01~1987/11


*FC서울 주요 성적

-K리그1 우승 => 1985

-K리그1 준우승 => 1986

-리그컵 5위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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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2.01.14. 15:54
이상래는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1985 시즌과 1986 시즌에는 럭키금성 최고의 미들라이커였습니다.

풋케위키에 따르면 이상래는 서울 우이초, 숭덕중학교를 거쳐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중앙고 시절 1학년 때 전국대회 4강권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고등학교 생활 동안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테스트를 거쳐 철도청 축구단에 입단했습니다.
이후 이상래는 철도청에서 링커를 맡아 활약하며 호평을 받았고, 1982년과 1983년에는 해군 축구팀에서 군복무를 하며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이상래는 고 박세학 감독의 조련 하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K리그 데이터포털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이상래는 1984년에 럭키금성 황소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럭키금성에 입단한 이후 자신의 은사였던 박세학 감독에게 다시 지도를 받습니다. 이상래는 입단 후 럭키금성에서 4시즌 동안 92경기에 출전하며 K리그 우승 1회와 준우승 1회를 달성했습니다.
1986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 프리뷰를 다룬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강득수, 최진한과 함께 공격형 링커 트리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상래는 1988년에 유공 코끼리(現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로 변신해서 백암중학교, 한남대학교 등에서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2013년 5월 24일, 영남대와의 U리그 경기 도중 지병인 간경화로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3개월간 간이식 등을 비롯해 수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같은해 8월 30일 오전 3시에 결국 소천합니다.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에 불과했습니다.

참고로 이상래가 생전에 FC서울에서 달성한 업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상래는 피아퐁, 강득수, 최진한, 조민국, 구상범, 박항서, 김현태 등에 비해 유명세는 적은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래는 럭키금성의 1985 K리그 우승과 1986 K리그 준우승을 논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선수입니다.

1985 시즌
팀내 K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2위
팀내 K리그 최다득점 2위
팀내 K리그 최다도움 공동 2위(왕선재와 동률)

1986 시즌
팀내 최다 공격포인트 1위(K리그+리그컵 합산)
팀내 K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2위
팀내 K리그 최다득점 공동 1위(조민국과 동률)
팀내 K리그 최다도움 공동 2위(박항서와 동률)
팀내 리그컵 최다 공격포인트 공동 1위(박항서와 동률)
팀내 리그컵 최다 득점 3위
팀내 리그컵 최다 도움 1위
title: 뗑컨Nariel 글쓴이 2022.01.14. 15:54
이상래는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럭키금성 황소(現 FC서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1985 시즌과 1986 시즌에는 럭키금성 최고의 미들라이커였습니다.

풋케위키에 따르면 이상래는 서울 우이초, 숭덕중학교를 거쳐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중앙고 시절 1학년 때 전국대회 4강권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고등학교 생활 동안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테스트를 거쳐 철도청 축구단에 입단했습니다.
이후 이상래는 철도청에서 링커를 맡아 활약하며 호평을 받았고, 1982년과 1983년에는 해군 축구팀에서 군복무를 하며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이상래는 고 박세학 감독의 조련 하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K리그 데이터포털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이상래는 1984년에 럭키금성 황소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럭키금성에 입단한 이후 자신의 은사였던 박세학 감독에게 다시 지도를 받습니다. 이상래는 입단 후 럭키금성에서 4시즌 동안 92경기에 출전하며 K리그 우승 1회와 준우승 1회를 달성했습니다.
1986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 프리뷰를 다룬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강득수, 최진한과 함께 공격형 링커 트리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상래는 1988년에 유공 코끼리(現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로 변신해서 백암중학교, 한남대학교 등에서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2013년 5월 24일, 영남대와의 U리그 경기 도중 지병인 간경화로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3개월간 간이식 등을 비롯해 수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같은해 8월 30일 오전 3시에 결국 소천합니다.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에 불과했습니다.

참고로 이상래가 생전에 FC서울에서 달성한 업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상래는 피아퐁, 강득수, 최진한, 조민국, 구상범, 박항서, 김현태 등에 비해 유명세는 적은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래는 럭키금성의 1985 K리그 우승과 1986 K리그 준우승을 논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선수입니다.

1985 시즌
팀내 K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2위
팀내 K리그 최다득점 2위
팀내 K리그 최다도움 공동 2위(왕선재와 동률)

1986 시즌
팀내 최다 공격포인트 1위(K리그+리그컵 합산)
팀내 K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2위
팀내 K리그 최다득점 공동 1위(조민국과 동률)
팀내 K리그 최다도움 공동 2위(박항서와 동률)
팀내 리그컵 최다 공격포인트 공동 1위(박항서와 동률)
팀내 리그컵 최다 득점 3위
팀내 리그컵 최다 도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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