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축구의 기둥, '샤프 김은중'의 창시자 故 권혁대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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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수를 위한 해외 원정 응원, 그리고 ‘샤프’
대전시티즌에는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김은중이었다. 대전 창단과 함께 대전 유니폼을 입은 김은중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그는 1998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도 발탁됐다. 당시 김은중은 이동국, 설기현, 송종국, 박동혁 등과 함께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다. 故권혁대 씨는 이때 구단으로 달려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 선수만을 위한 해외 원정 응원단을 만들어 봅시다.” 김은중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대회가 열리는 태국 치앙마이로 날아가자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故권혁대 씨의 눈은 빛났다. 꼭 이루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전 지역매체 사장이자 대전축구협회장이 2,500만 원을 후원했다. 당시 故권혁대 씨를 비롯해 20여 명이 태국 치앙마이로 가 김은중을 응원했다. 한 선수만을 위해 구성된 응원단이 해외로 원정을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유운호 씨는 대전시티즌에 입사해 대리 신분으로 원정 응원을 함께했다. 유운호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차범근 선수 응원한다고 단체로 독일 갔다는 이야기 못 들어봤잖아요. 아마 한 선수만을 위한 해외 원정 응원단 파견은 (김)은중이 때가 처음일 겁니다. 그때 혁대가 아주 반협박하면서 일을 추진했어요.”
물론 故권혁대 씨를 비롯한 원정 응원단은 김은중 외에도 대한민국을 열렬히 응원했다. 이 힘이 닿았을까. 당시 한국은 결승전에서 일본을 만나 이동국의 결승골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동국이 터닝슛으로 일본을 꺾었던 바로 그 역사적인 명경기다. 그날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동국이 받았지만 경기장에는 김은중을 연호하는 20여 명의 팬들이 있었다. 이제 막 프로 2년차에 접어든 19세의 어린 선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고국에서 날아온 이들에게 벅찬 감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故권혁대 씨는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든 대전 서포터스의 전설적인 존재가 됐다. ‘샤프’라는 김은중의 별명도 故권혁대 씨가 처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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